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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선생이 그리운 오늘

홍승표 2008. 9. 18. 08:35

삼봉선생이 그리운 오늘
2008년 09월 18일 (목) 홍승표webmaster@kyeongin.com
   
홍승표 (시인)
삼봉(三峯) 정도전 선생은 조선의 주춧돌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명성 높은 분입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격변기를 살았던 선생의 삶은 그 자체가 개혁이자 혁명이었지요. 스물아홉에 성균관 박사가 된 그는 서른네 살 때 나주로 유배를 가서 3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때 그는 농민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순박한 인정과 의리를 느끼고 비판의식을 키우게 되지요. 그리고 유배 후 6년간 유랑생활을 통해 혁명사상을 갖게 됩니다. 한마디로 선생의 사상은 성균관이 아니라 실제로 거친 벌판에서 백성들과 눈물 젖은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형성된 것이지요.

그 후 이성계를 만나서 위화도 회군과 조선건국을 돕고 개국공신으로 봉화 백에 봉해집니다. 이어 조선 왕조를 설계한 조선 경국전을 집대성하고 한양을 설계했으며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지요. 그의 사상은 백성이 곧 군주의 하늘이라는 철저한 민본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주장을 폈지요. 그리고 아무리 덕치를 잘해도 백성이 굶주리면 옳은 정치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민본, 위민정치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언로(言路)를 중시한 실용주의자이기도 했지요. 그는 옳은 일은 몸을 바쳐 행하고 옳지 않은 일은 죽어도 거부하는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삼봉선생은 이처럼 조선건국에 혼신의 열과 성을 다한 초인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반대파인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생을 마감했고 500년 가까이 역사의 뒷전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 후 고종에 이르러서야 훈작이 회복되었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으면서 완전히 복권되었지요.

이처럼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조선왕조를 설계한 그는 오직 일에만 매달려 집안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듯합니다. 부인 최씨는 편지를 통해 "당신은 글을 읽느라 아침저녁으로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알지를 못하시니 집안에 한 톨의 식량도 없습니다"라고 호소를 했지요. 그러자 삼봉선생은 "당신의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당신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라는 답신을 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다운 선비였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지요.

불행히도 지금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선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헌가체부를 실천하는 벼슬아치들은 보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옳은 일도 몸 사리기에 급급해 행하지 않는 관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얼마 전 영의정실에서 규제개혁을 총괄하는 실장이 "수도권규제완화는 필요한데 지방의 반발이 심해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참으로 한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권규제완화가 옳은 일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관리의 도리가 아닐까요? 윗분에게 잘하는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삼봉과 같은 굳은 절개와 지조로 사력을 다해 일하는 선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나라님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수도권규제 완화를 이행하지 않자 경기 관찰사가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앙에서는 "일부 지방 관료의 발언이 상궤를 넘는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지요.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나라님과 집권 당파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성장(省長)이 지역실정에 맞지 않으면 중앙시책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요. 다만 사전에 충분한 소통을 통해 이러한 불상사(?)가 많지 않을 뿐이라고 합니다. 당파의 우두머리라면 관찰사와 머리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충분히 논의해 대안을 마련해야 되는 것 아닌지요. 나라님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정승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나라님도 초심을 잃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삼봉선생이 그리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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