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소깍을 아시나요?
홍 승표
우리나라 사람치고 한번쯤 제주도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야자수와 같은 열대나무들과 낮게 엎드린 오름 들이 펼치는 이국적인 풍경의 제주도는 이미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세계적인 관광의 보고(寶庫)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필자역시 신혼여행을 시작으로 열 번도 넘게 제주도를 다녀왔지만 갈 때마다 새롭고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요. 그것은 제주도만이 가진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여행도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결혼기념일을 택해 아내와 올해 취업을 한 아들 녀석과 떠난 모처럼의 가족 여행이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그동안 결혼기념일은 많이 지나갔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저녁을 함께 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여러 가지 여건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지요. 출발은 다소 험악했습니다. 아내가 신분증을 안가지고 나와 공항에서 말다툼이 시작된 것이지요. 가뜩이나 시간이 늦어져 신경이 곤두서있던 필자가 아내에게 면박을 준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당황해하던 아내는 필자가 언성을 높이자 안가겠다고 돌아서버리더군요. 순간 아차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아들 녀석도 있는데 말이지요. 겨우겨우 사정사정해서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정말 십년감수했습니다.
그런데 제주 공항에 내린 아내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표정이 밝아지더군요. 역시 제주도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제주도 수산본부장으로 일하다 필자와 같이 연수를 받고 있는 분이 마중을 나왔더군요. 점심을 토속음식으로 맛있게 먹고 난 아내의 몸짓은 날아갈듯 했습니다. 둘째 날 서귀포 남원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쇠소깍이라는 곳을 찾았는데 아내는 좋아서 입이 다물어 지질 않더군요. 필자 역시 지금까지 본 제주의 어느 곳보다도 훌륭한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쇠소깍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소가 누워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한 커다란 웅덩이(沼) 같은 곳이고 깍은 끝을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현무암 지하를 흐르는 물이 용솟음치며 분출해 한겨울에도 물이 차갑지 않다고 합니다. 이곳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 사투리로 테우라고 불리는 이름의 뗏목을 타고 이동을 하더군요. 테우는 노를 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는 줄을 당겨 움직이게 되어 있었는데 오랜 옛날방식 그대로인 듯 했습니다. 쇠소깍엘 들어서니 절벽을 이룬 바위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뽐내며 줄지어 서 있더군요. 줄을 당기며 배를 움직이는 뗏목장의 입에서 호랑이 입, 쌍둥이, 부엉이, 벌집바위 등 그럴싸한 바위 이름들이 줄줄이 쏟아졌습니다. 모두 자신이 지은 이름이라며 웃는 그의 모습이 더없이 넉넉해 보이더군요.
제주도에서 뗏목 만드는 비용을 지원해줬고 수익금은 청년회 공동기금으로 쓰인다고 했습니다. 테우를 움직이는 일은 바람을 등지면 힘 안들이고 쉽게 갈수 있지만 맛 바람을 안고 갈 땐 장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청년회에서 가장 힘 좋은 사람으로 뽑혀 몇 년째 고생하고 있다며 호탕한 웃음을 날리는 그의 구수한 입담이 쇠소깍에 가득 담기더군요. 갑자기 새소리가 진동하더니 한 무리 새떼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엔 매화꽃이 가득피어 있고 그 위로 즐비하게 늘어선 고목들이 고풍스런 동양화를 떠 올리게 했습니다. 바위틈을 비집어 뿌리를 내린 나무들로 갈라져버린 바위모습들도 보이더군요.
유연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만고의 진리를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깊은 곳 끝자락까지 손바닥처럼 맑게 보이는 물속으로 유유히 노니는 고기떼의 행렬은 환상 그 자체였지요. 물위에는 물오리 몇 마리가 테우에 탄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떠 놀고 있었습니다. 신선이 따로 없었지요. 필자가 바로 신선이요 아내와 아들도 신선인 셈이었지요. 전날 공항에서의 사건은 잊은 지 오래인 듯 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고 흔들리지 않는 듯 미세하게 흔들리며 쇠소깍에 머문 시간은 분명 신선놀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적절한 조화로움에 모든 것을 잊고 신선의 경지로 들어섰던 것이겠지요.
이제 쇠소깍은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 것입니다. 새로운 비경의 관광보고(寶庫)로 각광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신비한 비경은 제발 훼손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주 오래도록 아는 사람만 조용히 쇠소깍을 찾아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사는 게 버겁고 혼란스러울 때 쇠소깍을 찾아가 보았으면 합니다. 버거운 삶의 뒤태나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질 것입니다. 신선이 된 기분을 만끽해 볼 수 있는 천상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