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홍 승표
다시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덧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어렵다고들 하지요. 모두들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IMF당시보다도 더 힘들다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전에 비한다면 지금 형편이 아주 형편없는 것만은 아니지요. 70년대만 해도 우리 주변에는 때 꺼리를 걱정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필자의 유년시절 아버지는 이른 아침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지요. 그리고는 어느 집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면서 보리쌀을 한 봉지 담아 나가신 후 빈손으로 돌아오시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처지였다고 기억됩니다. 종종 끼니를 거를 때가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우리도 궁색한 처지에 다른 집 돕는 게 말이 되느냐며 역정을 내시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집밖으로 슬그머니 사라지시곤 했지요. 당시 그리 많지 않은 논밭을 일구면서 6남매를 뒷바라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용케 살림을 이끌어나가시는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았지요.
하지만 학교에 가는 형제자매가 늘어날수록 학비를 마련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급기야 해거리로 논밭을 팔고 남의 땅을 빌려 함께 농사를 짓게 되는 상황이 오고 말았지요. 일부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사실 고등학교를 보내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시절이었지요. 그래도 아버지는 여동생들도 고등학교를 보내야한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얼큰하게 술을 드시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지요. “차라리 공부를 못하면 농사일이나 시키면 되는데 공부를 잘하니...”아버지에겐 공부를 잘하는 자식들이 그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던 셈이지요.
필자도 고교시절 이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대학은 언감생심 꿈을 꿀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던 필자는 고3 여름방학 때 연습 삼아 공무원시험을 보았었지요. 사실 2학기 수업도 남았고 군필자(軍畢者)에게 부여되는 가점도 없어 합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덜컥 합격이 된 겁니다. 학교 게시판에 이름이 나붙고 동네에서도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리 좋은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형이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에 둘째인 필자가 집안일이나 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셨던 것이었지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인 듯 했습니다. 필자는 열심히 집안일을 돕겠다고 했지만 반신반의하시더군요.
이러한 필자에게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해 11월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남여 고교생 문예작품 공모에서 필자의 작품이 장원으로 뽑힌 것이지요. 학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장원 상패를 받은 건 물론 필자에게 국문과에 한해 장학생으로 입학금과 1학기 등록금이 면제되는 특전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게 돼 좋겠다며 축하해주었지만 필자는 남모를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지요. 결코 대학엘 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겨울 방학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안도하시던 부모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그 일은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분간은 세상 사람들이 웃을 일보다는 울고 싶은 일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버거워 저물어가는 한해의 끝자락을 붙잡고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살다보면 분명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세상엔 할 수 있는 일, 웃을 수 있는 일이 너무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