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콤플렉스
홍 승표
얼마 전 학력위조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는 학력위조 사태에 대한 사회적 현실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돈과 학력이 사회적 강자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작용하는 나라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많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한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류대학을 가면 그 자체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나라도 그리 흔치 않을 듯하다. 일류대학을 나오면 학연을 동원해서라도 밥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들 대학이나 유학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살아가는 일이 너무 버거워 대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필자는 학력위조사태의 일련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회한과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삶과 그 역정이 그리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송아지 한 마리를 집으로 끌고 오셨다. 다른 집 송아지인데 송아지를 키워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부모님이 그리 많지 않은 농사를 지으면서 육남매를 키우는 일은 거의 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날품팔이는 물론 돈이 되는 일은 마다 않고 하시는 등 억척스러운 삶을 살고 계셨다. 그런데 맏이가 잘되어야한다며 형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내려하는데 세살터울인 필자도 중학교에 가게 되니 부담이 크셨던 것이다. 흔쾌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중학교를 못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송아지를 키워 남은 이익금으로 중학교에 갈수 있었고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 마리의 송아지를 더 키웠다. 문제는 고등학교였다. 형은 그때 대학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할 때였다. 부모님은 필자가 집안일을 돕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아래로 여동생 둘이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남동생도 둘이나 되었으니 첩첩산중이었던 셈이다. 당시 그리 많지 않은 논밭을 일구면서 육남매를 뒷바라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용케 살림을 이끌어나가시는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학교에 가는 형제자매가 늘어날수록 학비를 마련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급기야 해거리로 논밭을 팔고 남의 땅을 빌려 함께 농사를 짓게 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죽하면 필자를 중학교엘 보내기 위해 다른 집 송아지를 키우게 했을까 이해가 된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물론 아쉬움은 컸다. 못 마시는 술도 몰래 마셨다. 길이 보이질 않았다. 뒷산에 올라 어둠이 내릴 때까지 속절없이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다. 암울한 겨울이었다. 그러나 묵묵히 죽어지내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못 보내는 부모님의 참담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은 땔나무를 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땔감을 마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공교롭게도 친구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과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땔감을 지고 가다가 저만치서 두런거리며 오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면 지게를 세워 놓고 뚝 방 밑으로 숨어야만 했다. 학교엘 못가고 땔나무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자랑 할 일도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지나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얼마나 설움이 북받치고 눈물이 쏟아지던지 나뭇짐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소리죽여 울 때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거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를 찾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너무 아까운 놈이니 고등학교를 보내라고 매달린 것이다. 늦은 4월에 고등학교엘 들어 갈수가 있었다. 중학교 교복에 배지만 바꿔 끼우고 노트만 들고 학교엘 갔다.
노트에 필기한 것만으로 공부해 1학기 기말 시험을 제법 잘 볼 수가 있었다. 놀란 담임선생님이 2학기 교재를 선물로 사주셨다. 때로 수업료를 제때에 못내 교실에서 쫓겨나면 창밖에 서서 희뿌옇게 안개 서린 눈으로 교실 안을 기웃거리며 수업을 도강(盜講)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공부하며 열심히 집안일을 도왔다.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꿈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것도 집안일을 돕는 것도 그렇게도 신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대학은 언감생심 꿈을 꿀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던 필자는 고3 여름방학 때 연습 삼아 공무원시험을 보았다. 사실 2학기 수업도 남았고 군필자(軍畢者)에게 부여되는 가점도 없어 합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덜컥 합격이 되었다.
학교 게시판에 이름이 나붙고 동네에서도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리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당시에 형이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에 둘째인 필자가 집안일이나 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셨던 것이었다. 필자는 열심히 집안일을 돕겠다고 했지만 반신반의하셨다. 그런데 그해 11월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남여 고교생 문예작품 공모에서 필자의 작품이 장원으로 뽑혔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장원 상패를 받은 건 물론 필자에게 국문과에 한해 장학생으로 입학금과 1학기 등록금이 면제되는 특전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서 좋겠다며 축하해주었지만 필자는 남모를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집안 형편상 도저히 대학엘 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겨울 방학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해가 저물어가던 어느 겨울 저녁, 부모님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을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고맙다고 두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잘 생각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대학을 못 보내는 것이 미안하고 속이 상하셨는지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술을 한잔 걸치고 들어와 필자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리곤 다음날 필자의 손을 이끌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점퍼와 바지 두벌을 사주셨다. 교복 외에는 변변히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옷을 입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일은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도청으로 전입을 하게 되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도청엘 왔지만 지연이나 학연이 전혀 없는 필자는 망망대해에 놓여진 조각배 신세와 같았다. 열심히 일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도청은 군청과는 달리 고시출신도 즐비했고 거의 대부분이 대학졸업자들이었다. 속칭 가방끈이 짧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학력 콤플렉스를 겪은 셈이었다.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 그러다보니 일 잘한다는 평이 나기 시작했고 누구나가 같이 일하고 싶은 상품이 되어 있었다. 학력도 짧고 배경도 없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남들보다 승진도 빨리 할 수가 있었다. 6년 넘게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다섯 분의 관선지사를 가까이 모셨고 분에 넘치게 과장 승진도 빨라 많은 시샘을 사기도 했다.
도청 역사상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총무와 자치행정과장을 모두 거치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다. 덕분에 도청에 전입해 처음 일했던 과천부시장으로 일할 수 있었고 연수를 받은 후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팔당수질개선 본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뒤늦게 야간대학과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대학을 못 갔지만 공직생활을 하는데 있어 학력이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다시 태어나는 일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다시 또 유년시절의 눈물겨운 삶의 역경을 이겨낼 자신이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학력 차별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저 간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