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초지(碧 草池)에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우리나라에서 트로트 가수로 쌍벽을 이루는 태 진아, 송 대관 두 사람이 나오는 CF의 한 대목입니다. 연못위에 지어진 그림 같은 정자에서 두 사람이 판소리를 주고받으며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는 모습이 눈길을 끌지요. 그림 같은 그곳이 어디일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바로 파주 광탄 땅에 있는 벽 초지 문화 수목원이라는 곳이지요. “푸른 풀과 연못이 잘 어우러진 공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곳입니다. 벽 초지는 한 개인이 10여년 동안 가꾸고 준비해서 문을 연 수목원이라고 합니다. 약 4만여 평의 부지에 140 여종의 나무와 꽃들이 어우러져 사계절 색다른 모습으로 거듭난다고 알려져 있지요.
햇살이 더없이 고운운 날 그곳엘 갔습니다. 개장한지 3년밖에 안되었다고 하는데 아름드리나무가 즐비하고 나무들이 울창해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연못 주변에는 수백 년 된 버드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더군요. 연못에는 연꽃들이 고혹한 미소를 날리고 이끼와 풀로 뒤덮인 육각형 정자가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파련정이라 불리는 정자에 오르니 빼어난 경관이 한눈에 담기고 바람마저 시원한 것이 신선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유유히 떠 노는 잉어들과 떼 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들의 행렬도 마냥 평화로워 보이더군요.
무심교(無心橋)를 지나는 동안에는 세상 번뇌와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 마음이 고요했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구해 심었다는 소나무들이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아리 솔 길은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였습니다. 옛날 같으면 뭇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기에 제격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풍나무로 이루어진 터널은 가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살아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나무 터널을 지나면서 태백산에서 보았던 주목과는 또 다른 정취와 감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주목이 곧게 올라가지 않고 많은 가지를 가진 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요. 주목나무 터널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리지(連理枝)는 태생이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엉겨 마치 한그루의 나무처럼 보이더군요. 사람들은 연리지가 운명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해서 많은 연인들이 줄지어 찾고 있다고 합니다. 발길 닿는 곳 보이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눈웃음을 띄우고 새소리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수천 평의 넓은 잔디밭은 야외 음악회나 공연 공간으로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공간이 그늘이 드리워져 한 여름인데도 시원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지요.
통나무집도 하나 있었습니다. 수영장까지 갖춰진 이 집은 주말은 이미 내년 초까지 예약이 끝났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방문객이 빠져 나가면 수목원 전체가 내 세상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거진 숲속에서 실개천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일상의 스트레스와 버거운 삶의 더께가 말끔히 씻기어 내리는 듯 했습니다. 벽 초지는 분명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수목원입니다. 그런데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공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위적이되 결코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래된 고목들이 빼곡하고 실개천까지 자연을 그대로 살린 때문인 듯합니다. 벽 초지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주기위해 최대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는 많은 수목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광릉수목원을 제외하곤 이곳처럼 숲이 우거지고 그늘이 많은 곳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벽 초지는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결정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무를 심고 꽃을 심으면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수목원을 보여주겠다는 집념이 녹아 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진정성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지요. 사계절 다른 얼굴로 찾아드는 사람들을 반기는 벽 초지는 머지않아 누구나 찾고 싶은 명소로 거듭 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들이 다녀가면 입소문이 날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곳에 와서 나무가되고 돌이 되고 꽃이 되고 물이 되어 자연의 한 모습으로 지낼 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세상의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벽 초지는 내일도 또 다른 얼굴을 세상에 선보일 것이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삶의 근량을 저울질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쯤 벽 초지를 찾아 들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바로 우리 삶의 원천이자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