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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고치 실을 내듯

홍승표 2010. 3. 8. 08:37

누에고치 실을 내듯

                                    홍 승표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天命이 일러주는 歲寒行 그 길이다. >- 유안진 시인의 세한도 가는 길에서- 흰 호랑이해 벽두에 詩集을 선물 받았습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 땅 출판단지에 사는 분이 글 쓰는 사람에겐 책 선물이 제격이라며 주신 것이지요. 전업 작가도 아닌데 글 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저 민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선물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지요. 책은 주고받는 사람 모두에게 의미 있는 선물입니다. 나름 책은 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천년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원로 시인의 <세한도 가는 길>은 또 다른 차원의 격을 갖춘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명성이 일흔 나이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대단한 시인이기 때문이었지요. 더구나 그 분의 단아한 이미지에 걸맞게 한지로 이루어진 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다는 활판공방에서 한정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요. 누에고치에서 실을 내듯 납으로 된 글자 하나하나를 집어내어 활판 인쇄기를 이용해 책을 만든 것입니다. 아주 원초적인 옛날 방식으로 만든 것이지요. 한지로 만들어진 책은 천년이 간다고 합니다. 한정판에 고유번호가 있고 저자의 친필 사인과 인장이 날인되어 있으니 정말 귀한 책이지요. 한마디로 품격이 높은 책인 것입니다. 첨단인쇄를 거친 책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가치를 지닌 것이지요. 책값이 비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천년을 간직 할 수 있는 이러한 책이야말로 그 자체로 빛나고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훗날 이 책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 녀석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삭막하고 버거운 세상살이 속에서도 한지에 담겨있는 시 한수를 읊조릴 수 있는 여유를 전해주고 싶은 것이지요. 아들 녀석이 이 책을 대물림하고 또 대물림해서 천년세월이 흐르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가치는 대단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물의 가치는 대단할 것입니다.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활판공방은 이러한 측면에서 가히 국보급인 셈이지요. 아직도 글자 하나하나를 집어내어 조합해서 한지에 인쇄해 책으로 엮어낸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엄청난 정성과 노력에 비하면 경제적가치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적 측면에서는 기대이하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을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은 대단하고 존경받을만한 일이지요. 남다른 사명감과 역사문화를 지키고 가꾸고 보존시켜 나가겠다는 피 끓는 열정이 살아있는 소중한 분입니다. 사라진 것들이 그립고 아름다운 것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활판공방이 바로 이러한 곳입니다. 글자의 원형인 원도(原圖)가 있고 자부(字父)와 자모(字母)가 있습니다.

 

납 글자를 찍어내는 수동주조기도 있지요. 인쇄의 모든 공정이 손으로 이루어지고 한지와 잉크에서 풍겨 나오는 고유한 냄새가 공방의 정취와 향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입니다. 원도를 그려내고 외솔선생과 최초의 국정교과서를 펴낸 분은 고령으로 은퇴하셨고 일흔 되신 분이 글자를 조합하고 있습니다. 고전적인 모습 그 자체이지요. 두꺼운 안경테에 깊은 주름이 연륜을 짐작케 해주는 공방의 다른 분들도 마지막 명품을 빚는 마음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떠나면 과연 대를 이어 활판공방을 지킬 사람이 있을까하는 걱정도 됩니다.

 

이러한 일은 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일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인쇄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 이라고 자랑은 하면서도 사실상 방치해온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뜻있는 한 시인이 전국을 돌며 수집한 인쇄 장비로 활판공방을 마련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윽한 향기가 배어있는 한지에 엎드려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활자들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합니다.

 

이곳을 거쳐 나온 책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장정(裝幀)과 다소 투박하면서도 단아하고 고고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한권의 책이 천살이 되면 그자체로 역사요 문화향기가 아닐까 합니다. 천년을 간직할 수 있는 책을 가져보는 일은 행복한 일이지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활판공방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문화적 가치와 삶의 향기 가득한 기쁨 넘치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