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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에서...

홍승표 2010. 8. 31. 08:55

감악산에서

 

밤새도록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친 날 아침. 서둘러 파주땅 끝자락인 감악산에 들었습니다. 범륜사(梵輪寺)에서 만난 일행의 얼굴이 해맑아 보이더군요. 날씨가 좋아진 때문인 듯했습니다. 계곡을 따라 숯 가마터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지요. 오른편 능선을 따라 발길을 옮겼습니다. 지난여름 감악산을 처음 찾았을 때 면장을 하던 분이 가르쳐준 길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보고 ‘감악산 다람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산 구석구석을 꿰차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르내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산 사나이로 불리는 것이 싫지 않은 표정이었지요.

 

‘악(岳)자’가 들어 간 산치고 험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감악산은 다르지요. 그리 험하지도 힘들지도 않습니다. 적당한 오르막을 지나면 내리막이 나타나지요. 능선에는 예쁜 바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위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함께 흘러나온다고 해서 감악산(紺岳山)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지요.

 

능선에 있는 바위틈에는 신통하게도 소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두 그루가 아니라 제법 많은 소나무들이 보이지요. 그들은 참고 견딘다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오래 참아야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모진 풍파를 한 결 같이 이겨내고 살아왔을 그들을 보니 생명의 위대함과 자연의 오묘함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고개를 들어 눈길을 옮기니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줄기가 한 폭의 빼어난 그림처럼 보였습니다. 북한에서 발원하여 군사분계선을 따라 흐르는 임진강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고 남북을 잇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강기슭 건너 저편에는 송악산도 보입니다. 남으로 보이는 북한산과 별 다를 것이 없는데 북한 땅이라니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산자락 일대에는 아주 넓은 논밭이 즐비합니다. 이 광활한 평야지대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다지요. 곡창지대를 얻으려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셈입니다. 6.25전쟁 때도 설마 계곡 일대가 격전지였고 지금도 영국군 전적비가 지난날을 기억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장군봉을 지나 임꺽정 峰에 다다르면 굴(窟)이 하나 보이지요.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이 관군을 피해 감악산에 근거지를 마련해 살았고 이 굴도 피난처의 하나였다는 겁니다. 굴 아래는 가파른 낭떠러지여서 쳐다보기만 해도 저절로 오금이 저리지요.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인 듯합니다. 그 옆에는 임꺽정이 앉아 좌선(坐禪)했다는 바윗돌도 있지요. 그곳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습니다. 멀리 구름 한 자락이 헛기침을 하며 지나가고, 계곡엔 아직도 자욱한 물안개가 산 아래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더군요. 올망졸망하게 늘어선 산자락과 너른 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을 감으니 세상살이 너무 아옹다옹하지 말고 넉넉하게 살아가라는 바람소리가 더없이 상큼했습니다.

 

 

 

정상으로 발길을 옮기니 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쉬고 있더군요. 인근 사단에서 분대장급 사병들이 운동도 하고 친목도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파는 막걸리를 사서 그들에게 전했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더군요. 마늘 총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니 속이 저리도록 시원했습니다.

 

산에 들면 내려다보이는 세상, 그거 정말 별거 아니지요. 그 속에서 다투고 시기하고 산다는 것이 그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도 산을 벗어나면 별 수 없이 아등바등 살아야하는 게 인생살이지요. 가끔 산에 들어 세상을 관조(觀照)해 보는 일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더없이 소중한 보약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산을 벗어나 산촌마을 계곡에서 물소리를 벗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등목을 즐겼지요. 산행의 피로와 함께 찌든 삶의 더께가 말끔히 씻겨 내리는 듯했습니다. 지난여름 사건이 기억나더군요. 일행을 모두 물속에 던지는 바람에 저도 물속에 들었다가 나왔는데 갑자기 전직 대통령의 얼굴이 보이는 겁니다. “앗! 전두환 대통령이 오셨다.” 정말 똑같아 보였습니다. 일순 모두 뒤집어지더군요. 함께 간 일행이 가발을 벗고 들어왔는데 저만 몰랐던 것이지요.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오래도록 계곡을 뒤흔들었습니다.

 

산에 드는 일은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한가운데 임진강자락을 잡고 송악산과 북한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한 일이지요. 감악산에 들면 검고 푸른빛의 기(氣)를 받으며 사는 게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2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