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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長 이야기

홍승표 2011. 3. 1. 17:51

저와 함께 일하던 직원이 사무관 승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월요일 아침 얼굴이 창백한 것이 컨디션이 영 안 돼 보였습니다.“왜 그래 주말 잘 쉬고 와서는...” 지난 주말 사무관으로 승진한 그가 고향을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과장님! 그게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저는 배꼽을 잡고 웃어야 했습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강원도 산골 출신인 그가 자랑삼아 시골에 계신 어르신께 전화를 드렸다지요. “아버지! 제가 이번에 사무관이 됐습니다.” “뭐? 사무관이라고...그게 뭐냐?” 村老인 그의 어르신이 되묻더라는 것이지요. 공무원 직급을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 일겁니다. “네! 우리 동네 군청 과장하고 같은 겁니다.” “그래! 그럼 승진 된 거냐?” 어이쿠 이거야 원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칠 노릇이었다지요. “ 아버지! 우리 동네 면장하고 똑 같은 거예요” “면장! 그래! 벌써 면장이 됐다는 말이지? 너 이번 토요일 날 시골에 내려와라” 그러시더라는 겁니다.

 

시골에 내려간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앞마당에 멍석을 몇 개나 깔아놓고 동네사람들을 모두 불렀더라는 것이지요. 아들이 면장 됐다고 집에서 키우던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준비한 것입니다. “ 축하해 면장 됐다며...” 50여명의 동네 사람들이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신 그날 그는 초죽음이 되었다지요. 그런데 설상가상 다음날에는 친척들이 몰려 와 다시 술판이 시작됐다는 겁니다. 별수 없이 집안 어르신들이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신 그는 수원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추슬러 간신히 출근한 월요일이 아마 끔찍했을 겁니다. 제가 점잖게 한마디 던졌지요. “ 顯考學生府君 면하기가 쉬운 일인 줄 알아? 고생했으니 어디 가서 좀 쉬어...”

 

지금도 시골 어르신들은 면장이 최고인줄 아십니다. 제가 처음 고향 면사무소에 첫 출근 할 때 “열심히 해서 면장을 했으면 좋겠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지요. 그만큼 면장은 대단한 (?) 직책입니다. 상징적으로 동네 어른이라는 것이지요. 시골에 계신 형도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고향엔 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께서 함께 살고 계셨지요. 두 분은 형을 부를 때 늘 이름을 부르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면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호칭이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홍 면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갑자기 애들에서 어른 대접을 받게 된 셈이지요. 형은 지난해 시청 국장으로 일하시다 명퇴하셨습니다. 그래도 두 분은 지금도 홍 면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시골집을 면장 댁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면장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저는 어쩌다보니 면장으로 일할 기회를 가져보질 못했습니다. 지금도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정직 공무원이 면장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면사무소에 들어갈 때도 별정직 면장이었지요. 어느 면장이 가끔 지역 유지들과 밥값내기 일명 고스톱이라는 화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면장께서 거의 한 번도 밥값을 낸 일이 없었다지요. 본인은 스스로 머리가 좋고 그래서 화투를 잘 치는 거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면장을 그만두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을 때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지요. 화투를 칠 때마다 밥값을 내게 되더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일진이 안 좋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본인은 계속해서 터지고 후임 면장이 잘 되더라는 거지요. 그때야 “아! 내가 화투를 친 게 아니고 면장이 친 거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산 게 아니고 공무원으로 산 것이지요.

 

며칠 전 적성에 사시는 사재경이라는 어르신께 점심을 모신 일이 있습니다. 이분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길거리 정화활동을 하며 월 2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저소득노인 일자리사업」에 참여해 쓰레기와 폐품을 수거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르신은 이렇게 궂은일을 하고 받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신다고 합니다. 올해는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120만원을 등록금에 보태라고 전했다지요. 어머니와 어렵게 생활해온 학생도 어려운 일을 해서 받은 돈으로 도움을 주셨다는 걸 알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신도 어렵게 사는 분이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지요. 저 역시 그 분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말하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공무원이라면 본인은 한 푼도 기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을 돕자고 하는 건 잘사는 것이 아니지요. 공무원은 무한봉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가슴에는 새봄이 수줍은 얼굴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겨우내 닫혀 있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려고 합니다. 이제 봄의 햇살을 받으며 잎이 나고 꽃이 피고 풀꽃향기가 온 누리에 가득 넘쳐흐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꿈과 희망의 무지개를 떠 올릴 겁니다. 그 무지개에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도 넉넉하게 담겨졌으면 합니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거 그거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적어도 별정직 면장을 하며 착각 속에 살던 그 분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무원으로 산다는 것과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같은 삶 같지만 다른 것이지요. 새 봄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사는지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한번쯤 곱씹어 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