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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팔경을 보고*^*

홍승표 2012. 8. 17. 11:33

 

丹陽八景 素描

 

(예년엔 9일간 자란 수염이 산적나라 영의정같았는데 올해 휴가는 5일밖에 안돼 양아치수준입니다)

“ 仙人橋 아래로 흐르는 물이 紫霞洞으로 흘러드니 오백년 화려했던 고려왕조가 물소리뿐이로구나. 아이야, 고려가 하고 한 것을 물어서 무엇 하겠느냐.” 정도전의 -仙人橋 나린 물이- 全文

 

( 도담삼봉에 갔응 때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라서 선명도는 떨어집니다.)

단양하면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丹陽八景이 바로 그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島潭三峰은 팔경 중에 으뜸가는 절경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도담삼봉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鄭道傳幼年시절을 보낸 곳이라지요. 퇴계 이황 선생의 詩心을 흔들어 놓은 명승지로도 명성이 높습니다.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三峰山이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자 정선군에서는 단양까지 흘러들어온 삼봉에 대한 세금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소년이었던 정도전이 기지를 발휘해 一喝했다지요.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것입니다. 소년 정도전의 슬기로 단양에선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지요.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  도담삼봉은 일부러 옮겨놓은 듯한 세 봉우리의 어우러짐이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입니다) 

훗날 조선 개국 최고 功臣이 된 정도전이 호를 三峰이라고 지은 것도 도담삼봉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정선에서 단양까지 세 개의 커다란 봉우리가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삼봉의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단양이 빛나고 있는 것은 再論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햇살에 부서지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돛단배에는 黙想하고 있는 神仙이 앉아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많은 詩人墨客들이 이러한 아름다움에 빠져 시를 읊고 그림을 남긴 것이겠지요. 공원에는 도담삼봉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선생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銅像이 있습니다. 지금도 삼봉선생은 단양에 머무르며 강을 노래하고 도담삼봉을 노래하면서 悠悠自適하게 살고 계신 것이지요. 실제로 단양군에는 도전리라는 마을과 道傳路라는 길이 있습니다. 삼봉선생의 얼이 살아 있는 것이지요.

 

( 석문으로 바라보이는 강과 마을 전경은 무엇으로도 보기힘든 절묘한 구도로 눈에 들어옵니다)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단양 도담삼봉 옆 산에 있는 石門처럼 아름다운 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양 석문은 말 그대로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 이루어진 구름다리 모양의 돌기둥 문으로 동양 최대라고 하지요. 이 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정경은 한마디로 환상적입니다. 悠悠히 흐르는 강 물결이 햇살에 비늘처럼 부서지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이 수줍은 아낙네의 모습처럼 정겹기만 하지요. 아마도 삼봉 선생도 이 석문을 통해 강을 바라보고 마을을 바라보면서 思惟를 키웠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이러한 시간들은 선생이 훗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어 한양을 설계하고 조선의 기틀을 잡는 좋은 補藥이 되었을 것입니다. 흔히 도담삼봉을 가면 잠깐 구경을 하고 사진 한방 날린 뒤 휑하니 떠나는 것이 상례이지요. 그 옆 산으로 20분정도만 오르면 정말로 俗世에선 보기 힘든 天上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석문이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 70m 높이의 사인암은 흐르는 냇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舍人巖은 단양팔경 중 하나로 푸른 계곡을 끼고 있는 70m 높이의 기암절벽입니다. 고려 말의 학자 우탁선생이 정4사인재관벼슬에 있을 때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사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지요. 기암절벽 위에 서 있는 老松이 그림같이 서 있는데 흐르는 물에 가끔 내려와 더위를 식히곤 합니다. 이곳 암벽에는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유할 것이 없으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혼자서도 두려운 것이 없으며 세상에 은둔해도 근심함이 없다는 우탁선생의 글이 남아 있다지요. 사인암의 절경을 그리려던 김홍도 선생은 자그마치 1년 동안을 붓을 들었다 놓았다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그림에 일가를 이룬 大 畵伯도 사인암의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절경이라는 말입니다. 1년이 지나서야 김홍도가 그린 사인암과 계곡의 절경은 단원화첩에 남아 오늘에 전해지고 있지요.

 

( 우암 선생이 후학을 양성했다는 상선암에 앉아 물소리처럼 청아한 선생의 글읽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上仙巖과 중선, 하선암도 돌아보았습니다. 상선암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곳이지요. 흐르는 냇가의 널브러진 넓은 바위에 學童들을 앉혀 놓고 講論을 하거나 談論을 나누다가 더위에 지치면 냇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를 식히곤 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옛 선비들의 넉넉한 마음과 자연을 이용하는 슬기와 지혜를 가늠해 보기도 했지요. 우암 선생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후일을 도모하며 신선과 놀던 은 간 곳이 없고 학같이 맑고 깨끗한 영혼이 와 닿는 그런 곳이 바로 상선암이라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공부를 하고 호연지기를 키우던 학동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곳을 보고 딱히 손에 쥐어진 것은 없지만 이러한 생각을 해 본 자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좋은 보약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해 보았지요. 유람선을 타고 구담봉과 옥순봉, 금수산 등 절경을 바라보며 신선이 된 듯 착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고수동굴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보물같은 동굴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고수동굴은 단양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승지이지요. 남한강 상류에 자리 잡은 이 동굴은 관광코스로 이용하고 있는 구간이 있고 나머지 지역은 동굴 환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출입통제 구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부에는 동굴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자바위를 비롯하여, 웅장한 폭포를 이루는 종유석, 선녀탕이라 불리는 물웅덩이가 있지요. 7m 길이의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석순과 종유석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도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다리, 굽어진 암석, 꽃모양을 하고 있는 암석, 동굴산호, 동굴진주 등 희귀한 암석들도 많이 있지요. 이 동굴은 고생대의 석회암층에서 만들어진 석회동굴로서 그 학술적 가치 또한 크다고 하지요. 임진왜란 때 피란길에 밀양 박씨 일가가 이곳 주변을 지나다가 숲이 우거지고 한강의 풍치가 아름다워 정착해 살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바로 고수마을이라고 합니다. 동굴 부근에서 타제석기와 마제석기가 발견되는 등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주거지였다는 게 밝혀졌다지요.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말입니다.

 

 

(자연친화적인 모노레일을 타고 山 정상에 올라 바라본 청풍호는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모노레일을 타고 飛鳳山 정상에도 올랐습니다. 淸風湖와 늘어선 산들이 올망졸망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 그 자체이더군요.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더없이 평온해 보입니다. 하늘을 지나는 흰 구름들도 사는 거 그거 아옹다옹 살지 말고 내려놓고 살라며 손을 흔들어줍니다. 구름도 가끔 청풍호에 내려와 더위를 식힌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곤 하더군요. 단양팔경과 청풍호에 푹 빠져 지낸 시간은 정말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이었고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비취빛 물과 푸르른 하늘, 짙푸른 산자락을 바라보며 몸도 마음도 푸르게, 푸르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가끔씩 이런 여행을 통해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구름이 말해준 것처럼 내려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는 것, 그게 여행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합니다. 사흘간의 여행은 또 다른 삶의 보약이 되겠지요. 푸르른 강과 짙푸른 산자락, 삼봉, 우암선생의 를 받았으니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해봅니다.

 

 

(비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청풍호 전경은 보기만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