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仲秋 閑談

홍승표 2012. 10. 11. 09:37

仲秋 閑談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들이 저마다 다른 색동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뒤 뜨락에선 후두 둑 후두 둑 알밤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기만 합니다. 귀뚜리 노래 소리에 맞춰 고추잠자리 한 무리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은 男子의 계절입니다. 옷깃을 세우고 낙엽 지는 벤치에 앉으면 그가 바로 詩人이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아무 말 없이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면 그가 바로 哲學者인 것이지요.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을 살아가는 不惑의 세대는 잘 여문 곡식처럼 넉넉함을 만끽하는 계절이 될 것입니다. 知天命의 세대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겠지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삶을 달관한 耳順의 세대는 세상을 觀照하며 달빛 같은 마음으로 지내리라 생각됩니다. 박속처럼 흰 구름 한 점이 눈을 흘기며 中天에 떠 있더군요. 세상살이가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리더군요. 사람 산다는 것도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라는 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겠지요. 가을은 이렇게 蠱惑한 햇살과 하늘빛으로 깊어만 가는데 우리네 삶은 그리 넉넉지 못한 듯합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아놓고 한마당 큰 잔치를 벌이곤 했습니다. 豊年을 이루게 해준 하늘과 祖上님께 감사드리고 그동안 땀 흘린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自祝하는 자리였지요. 가을은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 모두에게 넉넉한 계절이었습니다.

 

곳곳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農樂소리 드높은 가운데 동네사람 모두가 신명나게 을 그리며 너울 덩실 춤을 추었지요.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정겨운 잔치였습니다. 동네잔치는 달이 동산 위로 얼굴을 내밀고 그 달이 술에 취해 불그레해질 때까지 늦도록 이어지곤 했지요. 하지만 올해는 이러한 동네잔치를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계절은 분명 더없이 화사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우리네 마음이 무겁고 그다지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입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삶에 대한의문부호가 쉴 틈 없이 날아들어 몸부림치게 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깊어지고 고민도 깊어지는 것이지요. 가을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더욱 절절하게 그리워지는 계절이지요. 지난 추석, 先山에 들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큰절을 올렸습니다. 예순 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와 홀로 남아 고생하시다 아버지 곁으로 가신 어머니는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자식을 돌봐주고 계시지요.

 

눈부시도록 맑고 화사한 햇살과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빛 때문일까 산을 내려오는 길은 콧등이 시큰해지고 더없이 처량하기만 했습니다.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문득 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산 노을에 두둥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아버지 애창곡 이었지요. 한참을 듣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부모님을 만나니 모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행복했지요. 가을은 모든 게 풍성한 마음도 넉넉해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려면 넉넉한 마음이 필요한 법이지요. 이러한 여유로움이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配慮하고 베푸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가을이 가을답기를 소망해 봅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 가득한 큰 마당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동네잔치가 벌어지기를 기대해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깊어가는 가을 저녁, 달님을 바라보는 小市民의 꿈이자 素朴한 바람일 것입니다. 내일 밤이라도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