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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홍승표 2013. 5. 8. 10:52

子欲養而 親不待

어버이날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날이지만 갈수록 그 의미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그저 절절할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부모님 살아생전 어렵게 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송아지 한 마리를 집으로 끌고 오셨습니다. 다른 집 송아지를 키워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지요. 그리 많지 않은 농사를 지으면서 여덟 식구가 살아가는 일은 거의 기적이었습니다. 흔쾌히 응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지 않으면 자칫 중학교를 못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송아지를 키워 남은 돈으로 중학교에 갈수 있었고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 마리의 송아지를 더 키웠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는 형제자매가 늘어날수록 학비를 마련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요. 급기야 해거리로 논밭을 팔아야 하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지요. 아쉬움은 컸습니다. 못 마시는 술도 몰래 마셨지요. 길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뒷산에 올라 어둠이 내릴 때까지 속절없이 울기도 했지요. 암울 했습니다. 그러나 죽어지내기로 했지요. 고등학교를 못 보내는 부모님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숙명이라 여기고 서툴지만 열심히 일을 도왔지요.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잔주름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피곤한 기색이 뚜렷했습니다. 부모님은 애써 힘든 기색을 감추려 하셨지만 그 힘든 속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지요. 일을 거들다 가끔 부모님을 바라보면 우연히도 눈이 마주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무 말씀도 없이 조용히 웃으시곤 했지요. 아마도 맏이가 잘 되어야 한다고 兄을 서울로 유학(?) 보낸 터에 둘째가 아무 불평 없이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 대견하셨던 듯합니다. 그래도 가끔 울화가 치밀어 볼멘소리로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매일 중3 담임선생께서 아버지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고교진학 문제를 상의하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두 분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만 기울이실 뿐 진학문제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왜 왔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묵시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4월말이 되어서 어렵게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학교 수업을 마치면 집안일을 돕는다는 단서가 붙었지요. 가끔 등록금을 제때에 납부하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나면 밖에서 창가에 서서 수업을 盜講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연세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생 문예작품 공모에 저의 작품이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지요. 상패와 함께 국문과 장학생 입학자격, 입학금과 1학기 등록금 면제 특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학을 가지는 못했지요. 집안 형편이 이 좋은 기회를 뒷받침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고교 졸업 전부터 공직생활을 한지도 38년이나 지났습니다. 군청에서 일하다 형의 권유로 전입시험을 보고 도청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면서도 문학도로서의 꿈은 버리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곤 했지요. 그러다가 공보실에서 일할 때 우연히 지방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습니다. 그게 덜컥 당선이 되어 새해 벽두 신년호에 제 당선작이 소개되고 제법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요. 우쭐한 마음에 상패와 상금일부를 봉투에 담아 부모님을 뵈러 달려갔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표정이 영 아니더군요. 자리를 박차고 나간 아버지는 밤이 늦어서야 술이 취해 돌아오시더니 제 손을 붙잡고 “ 미안하다. 너를 대학에 보냈어야 하는데...”하시며 울음을 터트리셨습니다. 아차! 내 생각이 짧았구나! 가슴을 치며 후회했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곤 합니다.

 

결혼을 하고 아들 하나만 키웠습니다. 그래도 흡족하게 잘해주지는 못했지요. 넉넉지 못한 박봉과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놀아주지도 못했습니다. 부모님께도 별로 잘해 드린 기억이 없습니다. 이제 아들 녀석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볼 때가 되니 무척이나 후회가 됩니다. 자식을 여섯이나 키우면서 얼마나 속 타는 일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절하기 때문이지요. 지금 부모님은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아버지는 예순둘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일흔 다섯 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홀로 지내시던 어머니는 당뇨에 치매를 앓으셨지요. 치매로 제 손을 잡고도 알아보지 못하실 때 그 처절함은 참으로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을 것입니다. 감옥에 간 아들을 위해 한글을 배워 매일 편지를 보낸다는 한 어머니의 모정이 생각납니다. 노래 「꽃구경」을 들으면 정말이지 가슴이 저리고 목이 메어 듣지를 못할 지경이지요. 꽃구경은 이렇습니다. 아들의 등에 업혀 꽃구경 가던 어머니는 마을과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그만 말을 잃어버립니다. 고려장하러 가는 길임을 직감하신 것이지요. 사는 것이 너무도 버거워서 어머니를 고려장 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솔잎을 따서 길에 뿌리며 가지요. 아들이 뭐하냐고 물으니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때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자신을 버리러가는 아들을 원망하기는커녕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지요. 어버이날은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 정말 뼛속까지 사무치고 또 사무치는 날입니다.

 

자식이 봉양하려 하지만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子欲養而親不待)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사는 것이 힘겨울 때 가끔 부모님 묘소를 찾아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돌아가셨어도 부모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지요. 죽을 때까지 어버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백년 죽어 백년 한결같은 어버이지만 기왕이면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을 잘 모시려 해도 세상에 안계시면 백번 천 번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때를 놓치고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요. 자식에게 어버이날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하루하루가 어버이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