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르신들은 비오는 날 왔다갔다 나돌아 다니면 청승떤다고 했습니다. 비 맞은 중처럼 주절거리냐 라는 말도 있지요. 가을비가 내리는 날, 모처럼 청승 한번 떨었습니다. 연천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출발해 감악산엘 들었습니다. 파주에서 일할 때 스무 번 가까이 오른 산인데 새로운 느낌이 들더군요.
고향 후배인 김한섭 연천 부군수 초청을 받은 것이지요. 늦가을 비 내리는 산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정취도 일품이었지요.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조차 일부러 만들어 낼 수 없는 기막힌 정경이었습니다. 물 젖은 구름과 물 젖은 나무들을 보며 생각도 물에 젖어 촉촉하고 싱그러웠습니다.
맑은 날 감악산이 화사한 수채화 같다면 비 내리는 감악산은 파스텔 톤의 수묵화 같은 그런 느낌이었지요. 산길이 조금 미끄러워 조심조심했는데도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상에서 바라본 안개 젖은 산자락은 그 나름 촉촉이 젖은 눈매처럼 아득하고 아늑하더군요. 감악산에서 보낸 늦가을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때로 산을 정복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가당치않은 말입니다. 잠시 山에 머무를 뿐이지요. 정복한다는 건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일입니다만 산은 절대 무릎 꿇는 일이 없습니다. 산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라져도 산은 그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산을 오른다는 말보다는 산에 들어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이유입니다.
산에 들어 나무와 돌이 되고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면 때로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을 때가 있지요. 그만큼 산에 드는 일은 행복한 일이고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신비로운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한없이 微微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세파에 찌든 삶의 더께가 말끔히 씻어져 내리고 산에 대한 敬畏와 무한 감동이 물결칩니다. 산은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