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월급쟁이 아니다, 사명감 가져라"
[이슈&사람] 한동훈이 만난 홍승표 용인부시장
이 코너의 초대손님으로 1급(관리관) 이하 일반직 공무원을 선택한 것은 처음이다. 사표(師表)가 될 만한 공무원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밥벌이’용으론 마뜩잖아서 내 잣대에서 1급 이하는 열외(列外)였다. 공무원은 ‘이슈’와 거리를 둬야 하는 천명(天命)을 타고 난 직종이다. 인생 스토리도 거기서 거기다. 인지도마저 낮아서 신문 상품으로 치면 하품(下品)이다. 홍승표(58) 용인부시장은 2급(이사관)이다. 스스로 정한 기준을 어긴 셈인데, 난 이 코너에 그를 초대하기 위해 2년 6개월이란 세월을 기다렸다. 그는 경기도청의 새로운 밀레니엄 전야(前夜)에 공복(公服)을 벗는다. 경기도청은 1914년 개청했고, 그는 오는 30일 명예퇴직하니 새로운 100년은 후배들 몫이다. 그는 경기도청 100년사(史)에 몇 안되는 ‘たたかい’(다다까이) 전설이다. ‘다다까이’는 싸움·전쟁·전투 뭐 이런 뜻으로 번역되는데, 공직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면서기(9급)로 출발해 사무관(5급) 이상 반열에 오른 비(非)고시 출신 공무원을 통칭한다. 그에겐 37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행정고시 전성시대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다다까이’의 한계치에 올랐다. “앞으로 1~2명외에는 이사관은 꿈도 못 꿀 거예요. 도지사들이 고시만 키우고, 비(非)고시는 안키워 주니까… 내가 거의 마지막 세대죠.”
―공직생활은 얼마나 하신거죠?
“38년 11개월 했어요. 오래했죠. 이무기죠 이무기. 스무 살도 안돼서 시작했으니. 고등학교 3학년(1974년) 여름방학때 시험에 붙어서 이듬해 2월 1일에 임용됐어요. 같은해 2월 15일에 졸업했으니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다닌거죠.”
―첫 임지가 고향이었죠.
“네. 실촌면 면서기. 그때 아버지가 ‘잘하면 면장은 할 수 있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못할 것 같더라고요. 당시 면장이 8년째 하고 있었는데, (정년이)4년 더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경기도청 전입시험을 봤어요. 1981년에 도청 직원이 됐는데, 잘못 왔다 싶었어요. 시청은 대졸이 20%도 안됐는데, 도청은 70%가 대졸이더라고요. 고시도 많고요. 죽어라 일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무관 될 때까지 오전 7시30분 이후에 출근해 본 적이 없어요. 기를 쓰고 한 거죠. 마대들고 사무실 청소하고, 고참들 출근하면 차도 타주고… 매일 그렇게 일 했어요.”
―광주시청 공무원 임용 동기는 지금 어떻게 됐나요?
“6급부터 서기관(4급)까지 다양해요. 제일 높은 동기가 서기관이고, 아직도 계장(주사)이 두 명 있어요. 계장은 18년째 주사(6급)지만.”
―고비는 없었나요?“
여러 번 있었죠. 그중 가장 큰 고비는 1987년 대통령 선거였어요. 당시 공보실 소속으로 보도자료를 담당했는데, (노태우 당선자가) 경기도에서 몇%이겼다, 경기도가 승리에 기여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썼어요. 지시를 받고 위험수위에서 간당간당하게 썼는데, 당시 직속 상관이던 기획관리실장이 말미에 넉 줄을 더 달았어요. 그게 엄청났죠. ‘(도청)고위직 간부들이 논공행상을 염두해두고 있다’는 내용이었거든요. 이튿날 동아일보 1면에 ‘정신 나간 공무원들’이란 기사가 난 거예요. 그 다음날은 사설에 났고요. 그 얼빠진 공무원이 내가 된 거였죠. 사표를 써서 부지사에게 냈죠. 방법이 없잖아요. 부지사가 진상 조사를 시켰어요. 다행히 원본이 있어서 살았죠. 부지사가 불러 서 사표를 찢더라고요. “당신들이 한 것도 아닌데 왜 총대를 메려고 하느냐”면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인데 당시 실장과 도지사는 영전했어요.”
―공직사회도 많이 변했죠.“
그럼요. 1970년대, 80년대 초만해도 공무원들이 하면 주민들이 따라줄 때잖아요. 그때는 호응도 해주고 그랬어요.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게 안돼요. 특히 민선이후에는 주민들이 하급 공무원은 거의 상대하지 않으려고 해요. 단체장 이런 사람들만 찾아요. 내가 뽑았다 이거죠. 근데 그것이 좀 위험한 생각인 것 같아요. 공직사회도 비슷해요. 지금은 대학 나와도 (공무원 시험에) 붙기 힘들잖아요. 머리는 좋아요. 영어 프리토킹하는 놈도 있어요. 그런데 조직 적응력은 빵점이에요.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하죠. 예를 들어 회식하자고 하면 ‘저 약속 있는데요’ 이래요. 옛날에는 결속력이 좋았는데 요즘 애들은 그게 없어요.”
―국가관은 어떤가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우리 때만 해도 새마을 운동하면서 초가지붕 내려주고 했는데, 요새 애들은 그런거 안해요. ‘우리가 무슨 일용직이냐’고 하면서. 단순한 월급쟁이로 생각해요. 지난주 월요일에 신입 공무원을 대상으로 이런 특강을 했어요. ‘공무원이 완장이라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뭐를 잡고, 규제하려고 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공무원 자격이 없는거다.’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소냐가 지난해 4월에 패티김의 사랑의 맹세를 불렀다. 노래 부르면서 수화를 했다. 2주일 동안 배웠다. 소냐가 혼혈아인데 거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겠나. 소냐도 울고 패티김도 울고 다 울었다. 그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보면 지도층이다. 정책을 전초기지에서 수행하는 첨병이다. 아무리 대통령이 좋은 정책을 내도 집행하는 사람은 일선 공무원이다. 공무원들이 안 움직이면 정책이 무슨 소용이냐”고. 잘 알아듣지 못해요.”
최근 몇 년간 경기도청 ‘다다까이’ 큰 형님 역할을 해온 홍승표. 그는 단지 높은 자리에 올라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다다까이 전설’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아니다. 행정고시가 우글거리는 경기도청에서 고졸 신화를 썼다. 전설 선배들의 무용담을 뛰어넘을 만큼의 업적도 남겼다. 그는 올해 한국인운동본부가 선정한 ‘도전 한국인 10인’(자랑스런 자치단체상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반기문 UN사무총장, 박찬호 선수(2011년), 김용 세계은행 총재, 싸이, 장미란 선수(2012년) 등이 수상 선배다. 경기도내 전·현직 공무원 가운데 ‘경기도를 빛낸 영웅’으로 선정됐고, 2011년에는 ‘다산대상 청렴봉사 대상’을 받았다. 전국 지방공무원을 대표해 정부의 공무원직종개편위원회 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법안을 입안한 공을 인정받아 전국 광역자치단체 공무원노동조합 총연맹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경기도청 직원들이 매년 선정하는 ‘함께 일하고 싶은 베스트 공무원’에 4회 연속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큰 상을 많이 받으셨는데 비결이 뭡니까?“
일. 일로 승부해야죠, 그리고 또 하나는 바른말을 해야 해요. 도지사 다섯 분을 모셨는데, 바른말 딱딱했어요. 당시에는 싫어하지만, 며칠 지나면 내 말이 맞거든요. “홍 비서 엊그제 한 말이 맞더라고” 이랬어요. 바른말 하고 일로 승부해야죠. 소통도 중요하고요.”
―요즘 공무원들 4년마다 시달리는데 일로 승부가 될까요?
“70점 맞던 놈이 담임 선생님 바뀐다고 100점 맞는 건 아니잖아요. 눈치보는 놈이 이상한 거지.”
―공무원 조직에 패가 갈렸잖아요?
“경기도청은 그나마 덜한데 일선 시·군은 이래요. A, B후보가 있잖아요. A에게 줄서는 놈, B한테 줄서는 놈, AB어느 쪽에도 줄 안서는 놈. A가 되면 4년 동안 편한거고, B가 되면 4년 동안 죽는 건데. 아무 쪽에도 안선 놈은 그냥 찍히니까 그래서 줄 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예 양다리 걸치는 놈도 있어요. 문제가 심각해요.”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제도적으로 부시장·부군수를 국가직 공무원으로 전환하고, 사무관까지 인사권을 보장해줘야 해요. 쉬운 문제는 아니죠. 이인재 파주시장 같은 분이 대안이죠. 이 시장은 인사만큼은 꼭 부시장과 상의하도록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부시장에게)힘이 쏠리데요. 직원들이 일부러 결재를 받으러 오고 그랬지요. 부시장 힘 안 실어주면 시장도 좋을 게 없어요.”
―쓴소리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2011년 자치행정국장 때 (게시판에)이런 글을 올렸어요. ‘욕먹을 각오하고 이 글을 띄웁니다’하고 욕을 실컷 했어요. 당시 1천500원이던 구내식당 단가를 500원 올리려는데 그걸 반대했어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한 달에 두 번 외식하자고 했더니 그것도 반대했고요. 심지어 여직원은 왜 구제역 비상근무 현장에 안내보느냐는 말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니들 정신상태가 틀렸다. 제주도도 2천500원인데, 정신 차려라. 파주시 공무원은 여직원이 구제역 비상근무에 걸리면, 남자 직원들이 대신 나갔다. 7~8번, 심지어 10번 나간 직원도 있다. 그런데 고작 1번 나가면서 여직원 운운하는 너희들 참 자격 없다. 말이 도청 직원이지 시청 직원보다 어림없다. 이 자식들아 정신 차려라. 그렇게 썼어요. 댓글이 100개 넘게 달렸는데 두 놈 빼고는 다 공감했어요.”
―구제역 얘기 나온 김에 파주부시장 때 얘기 잠깐 하죠. 당시 어땠나요?“
그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는데…. 딱 100일 걸렸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아침 6시 출근해서 새벽 2시까지 일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밥 맛이 없고, 머리털이 빠졌어요. 하루는 시멘트 바닥을 밟는데 스펀지를 밟는 것처럼 쑥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어서 링거 한대 맞았죠. 직원들 몰래 네 번 맞았어요. 설날 아무도 나오지 말라고 지시하고 상황실에 나갔는데 밥 먹을 곳이 없는 거예요. 국수집 딱 한 곳이 문을 열고 잔치국수를 팔더라고요. 난생처음 국수 두 그릇 먹었어요. 울컥하데요.”
―공무원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많겠네요.
“‘공무원은 단순한 월급쟁이가 아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싶어요. 공무원은 사회지도층이죠. 그럼 사회지도층은 뭐냐. 청렴결백은 기본이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도와줄줄 알고 행정을 긍정적으로 처리할 줄 알아야죠. 다치지 않으려고 몸 사리면 그 순간 주민들이 불편해지는 거예요. 사명감 없는 공무원은 공무원 자격이 없는거죠.”
‘문학소년’ 홍승표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명문대 진학을 포기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3년 연세대학교가 주최한 전국 남녀 고교생 문예콩쿠르에서 장원을 했어요. 연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딴 셈이었는데, 학비가 없어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어요.” 그는 지금까지 시집 1권과 수필집 3권을 냈다. 수원 광교산 입구에는 그의 시(詩) ‘광교산’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다. 그는 40년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네번째 수필집 ‘꽃길에 서다’를 썼다.
―등단은 언제 하신 거죠?
“1988년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91년에는 한국시조 신인상 받았아요. 정식으로 배우지 못해서 느낌으로, 감성적으로 써요. 책 한권 내려면 500만~600만원 정도 들어요. 출판기념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집사람이 돈도 없는 사람이 돈 지랄 한다고 잔소리 하겠어요. 이번에는 출판사와 정식으로 인세 계약을 맺었어요.”
―새로 쓴 수필집 제목이 여성스럽네요. 어떤 의미가 담겼나요?
“김춘수의 ‘꽃’ 있잖아요. 나를 불러줬을 때 나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 광주에서 나를 불러줘야 되잖아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지요. 애둘러 표현한 거죠. 광주사람들이 나를 불러주면 내가 거기 가서 씨 뿌리고 싹 틔우고 열매 맺는 그런 일을 하겠다는 의미죠.”
―정년이 2년 남았는데 퇴직을 결심한 이유가 뭔가요?
“부시장이 아무리 똑똑하고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 아이디어를 받아주는 건 단체장이잖아요. 부단체장은 뜻을 펴고 싶어도 단체장을 넘어설 수 없어요. 뜻을 펴보고 싶은 거예요.”그는 다음달 18일 고향 광주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인생 2막을 시작한다. 아파트 한 채, 퇴직금과 연금, 책 5권, 폭탄주 제조 자격증이 전부인 그의 앞에 놓인 그 길이 가시밭길일까? 꽃길일까?
대담=한동훈 정치부장/funfun@joongb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