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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표*^*

홍승표 2018. 5. 21. 09:14

사표를 내고 흘렸던 눈물

 

공보실에서 도정홍보 자료를 만들어 언론사에 제공하는 일을 하던 시절이었지요. 일이 잘못 꼬여 중앙지에 대서특필되고 사설은 물론 메이저 방송 뉴스에도 큰 이슈로 보도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상사가 홍보 자료에 말도 안 되는 글을 첨삭해 놓은 게 발단이 된 것이지요. 홍보자료는 늘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하는데 오해를 살만한 말을 삽입시켜놓은 것입니다. 재하자 유구무언(在下者 有口無言)이라, 스스로 책임을 지기로 했지요. 막상 사표를 내던지고 돌아서는데 너무 억울하고 설움이 북받쳐 올라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부모님과 아내, 아들 녀석 얼굴까지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지요. 어둠 속 포장마차에 들어 눈물이 녹아든 술잔을 기울이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집에서 나와 이리저리 방황하며 보냈지요. 산자락을 돌아보거나 원천유원지에서 초점을 잃은 채 넋 놓고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해질녘 아는 기자를 만나 술잔을 기울였지요. “사실대로 말해라, 기자들은 계장이나 홍주사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들 한다.”고 다그쳤습니다. 부지사가 조사계장을 불러 사실규명을 지시해 조사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조사해도 사실이 밝혀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운명에 맡겨야지요.” 일할 때는 금방 점심시간이 되고 금방 퇴근 시간이 되었는데 하루해가 그렇게 지루할 줄은 몰랐습니다.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는 안색이 좋지 않다면서 술 좀 줄이라고 하더군요.

 

사흘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지내고 있던 차에 부지사께서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들어갔습니다. 부지사가 당신들이 한 일이 아닌데 왜 아무 죄 없이 사표를 쓰냐.”고 호통을 치며 사표를 찢어 버리더군요. 그리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는 말을 듣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사무실에 돌아오니 동료 직원이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하는데 순간 울컥했지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날 저녁 함께 사표를 썼던 계장님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허탈하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생 쇼를 했습니다. 누명을 벗어 좋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고,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그때,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했습니다.

 


그 사건 후 저와 계장님은 나름 의리 있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지요. 만나는 동료 선후배들이 대단하고 잘한 일이라며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새삼 깨달았지요. 진실은 밝혀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입니다. 그 사건에도 불구하고 도지사는 서울시장으로 영전하고 부지사도 영전을 했지요. 훗날 사건 발단의 주인공도 영전을 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일이 수습된 후 적어도 겉으로는 못생긴 콧날만 어루만지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냈습니다. 사무실도 그렇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어깨가 늘어져 있고 표정이 어두우면 가족이 불안해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힘이 들 때면 술 한 잔 걸치거나 산에 들어 도 닦는 심정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부모님과 아내에게 사표를 썼다고 말했으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을 테지요. 더구나 일곱 살 아들을 둔 아내는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한 일이지만 수습이 잘 되었으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에도 두세 차례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살얼음판을 걷듯 지낸 적이 있었지요. 그러면서 많은 생각과 성찰의 기회를 가지며 마음을 단련해왔습니다. 이러한 내공이 쌓여 웬만큼 어려운 일은 능히 극복해내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면 희망이 보인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지요. 책임을 진다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감추는 일은 비겁한 일이지요. 사표를 내고 눈물을 흘렸던 일은 공직의 길을 걷는 동안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보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