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글을 내보이는 건 더없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벌거숭이처럼 내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색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문인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글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글을 선보이는 게 두렵기만 합니다. 너른 고을(廣州)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산자락이 여여 하게 흐르는 남한강과 조잘거리며 흐르는 시내(川)와 어우러진 그림 같은 곳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비록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지만 아옹다옹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순박함이 있었습니다. 산과 들을 벗 삼아 살아오면서 산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본 것은 더없이 소중한 일이었지요.
고등학생에 들어갈 무렵 전기가 들어왔으니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었습니다. 농사일을 돕다가 틈틈이 책을 읽거나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천렵을 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반딧불이 수도 없이 떼 지어 날아드는 원두막에서 은하수를 바라보다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러한 삶이 곧 한편의 시였고 수필이었지요. 가끔 쓰는 일기장엔 경이로운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글을 어떻게 쓰는 게 잘 쓰는지도 모르면서 생각나는 대로 꾸밈없이 써내려가곤 했지요. 중학교 시절 어쩌다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했습니다. 좋기도 했지만 덜컥 겁이 났지요. 그렇다고 글 쓰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글을 잘 써야 하겠구나하는 부담감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지요. 상을 탄 놈 글 솜씨가 손가락질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행히 고교 입학 후 좋은 국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지요. 경희대 전국고교생 백일장에서 장원을 해 국문과에 특례 입학을 한 문인이었습니다. 가끔 글에 대한 생각이나 군더더기 없이 글을 쓰는 기본을 배울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지요. 글의 근량이나 가치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쓴다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연세대학교 고교생 문예작품 현상 공모에 당선이 되고 198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기쁨을 안기도 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작을 한 것이 도움이 된 듯합니다. 그 후엔 더더욱 글 쓰는 일이 힘들고 두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 자연의 일부로 살아온 덕에 가슴 속 한구석 감성의 뿌리가 깊이 살아있는 게 좋은 보약이 되었지요. 저의 글은 산이나 강, 자연을 주제로 한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자연과 뒹굴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꿈속에서도 산이나 들을 만나곤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변해가도 자연은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곤 하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이러한 연유로 가슴 한구석 감성이 살아 숨 쉬고 억매이지 않는 자연이 글 속에 저절로 녹아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뿌리 깊었고 넓은 토양을 갖고 있었지요. 단순히 삶에 대한 의지를 넘어 삶에 대한 경건함과 경외감이 가슴속 깊이 內在되어 있었지요. 그것은 자연에 대한 노래 속에 삶의 의미와 말로 표현조차 어려운 가치가 담겨지는 좋은 보약이 되었습니다. 글의 생명력이나 살아가는 일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지요. 자연은 삶의 지주이자 정신적 스승이기도 해서 감성적이지만 단호한 의지와 철학이 살아있는 글로 그 생명력이 표출되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글이 도식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글 쓰는 일이 더욱 어렵고 부담으로 다가 왔지요. 그런데 한편으론 깊이와 넓이가 더해진 글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대견한 일이었고 나름 살아간다는 것이 연륜을 더하면 더욱 무르익어가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젊은 시절에 쓴 글은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간 글이 많았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그게 부끄러운 일인 줄 몰랐으니 창피한 일이지요. 창피하기까지 한 일이었지요. 불혹을 넘기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객기부리지 않고 넘치지 않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많이 쓰기 보다는 벌거숭이로 세상을 만난다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이지요.
가을 단풍처럼 화려하거나 아기자기하지는 않지만 절제된 단아한 글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농익은 가을 풍경 속에서도 들뜨거나 요란스럽지 않게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이지요. 가을은 그 자체로 넉넉하고 풍요로운데 굳이 살을 덧붙이고 더 요란한 옷을 입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겨울을 맞이하려는 생각의 둘레가 고스란히 녹아들기 시작했지요. 생각도 나이가 들면 더욱 깊어집니다. 철없던 시절, 천방지축 덜렁거리며 나돌던 설익은 가슴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기 때문이지요.
스스로 길을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혼자 길을 가다 넘어지거나 몸이 아프면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지요. 함께 길을 가야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부축해주고 아프면 약도 구해주고 돌봐주는 게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知天命을 넘기고 耳順에 이르면 생각이 달라지지요. 스스로 의문부호를 던지고 그 답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집착이나 두려움이 어느 정도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살아가는 일,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의식과 치열함은 부족했지만 늘 정신적으로는 남다른 감성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살아가는 게 버거워 정신없이 쳇바퀴 돌 듯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천명을 넘기면서 삶에 대한 애착과 치열함이 생겨났습니다. 얼굴은 주름살이 늘어나고 벗겨진 머리가 그나마도 半白이지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지요. 외형은 비록 찌그러졌지만 생각은 더 건강해졌고 깊어지고 넓어졌습니다. 흔히들 마음을 비운다고 하지요.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그건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지요.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고 산다는 게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本來無一物이라는 말이 있지요. 본디 한물건도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은 비우고 내려놓고 싶지만 그게 간단치 않은 일이지요. 사는 게 간단치 않다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일도 그러합니다. 생각은 많은데 그 無形의 思惟를 글이라는 實體로 고스란히 옮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글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제게 남아있는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재미없고 힘들게 사느냐는 핀잔을 받을 때가 있지요.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의 삶이 반드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내 맘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을을 보면 中天에 떠 있던 해보다도 아름답습니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노을빛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지요. 노을은 아름다움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비록 해맑은 햇살처럼 화사하지는 않지만 깊고 그윽한 그리움으로 젖어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한낮의 햇살이 그리운 것은 젊은 시절 살아온 일들이 너무도 어설프고 서툴렀다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여름 그 붉게 타는 폭염과 지루했던 장마에 시달리며 지내왔지만 그조차도 그리운 때가 온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삶의 소중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릅니다.
글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글 쓰는 법이 각인되어 있었다면 감성적이고 자유로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틀에 억매여 어느 글 하나도 제대로 숨 쉬고 다른 향기를 내지 못한 채 나뒹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 와 새삼 다시 글 쓰는 법을 배울 생각은 없습니다.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쓸 생각이지요. 앞으로도 절제하면서 조심스럽게 글을 쓰려고 합니다. 어깨너머 살얼음이 깔리는 시간과 공간을 마다않고 본디 그대로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옮겨 보겠다는 말이지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