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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날, 저녁달을 바라보며...^^

홍승표 2020. 10. 5. 10:37

눈 시린 푸른 하늘 아래 들이 저마다 다른 색동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뒤 뜨락에선 후두 둑 후두 둑 알밤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기만 하지요. 귀뚜리 노래 소리에 맞춰 고추잠자리 한 무리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옷깃을 세우고 낙엽 지는 벤치에 앉으면 그가 바로 시인입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아무 말 없이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면 그가 바로 철학자인 것이지요.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을 살아가는 불혹의 세대는 잘 여문 곡식처럼 넉넉함을 만끽하는 계절이 될 것입니다. 지천명의 세대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겠지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삶을 달관한 이순(耳順)의 세대는 세상을 관조하며 달빛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눈을 흘기며 中天에 떠 있는 박속처럼 하얀 구름에게 세상살이가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름은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렸지요. 사람 산다는 것도 덧없이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 같은 존재라는 메시지인 듯했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겠지요. 가을은 이렇게 매혹한 햇살과 하늘빛으로 깊어만 가는데 우리 삶은 그리 넉넉지 못한 듯합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아놓고 한마당 큰 잔치를 벌였지요. 풍년을 이루게 해준 하늘과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그동안 땀 흘린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자축하는 축제였습니다. 가을은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 모두에게 넉넉하고 여유로운 계절이었지요.

 

곳곳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농악소리 드높은 가운데 동네사람 모두가 신명나게 을 그리며 너울 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정겨운 잔치였지요. 동네잔치는 달이 동산 위로 얼굴을 내밀고 그 달이 술에 취해 불그레해질 때까지 늦도록 이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이러한 동네잔치를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계절은 분명 더없이 화사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우리마음이 무겁고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지요. 흔들리는 갈대처럼 삶에 대한 의문부호가 쉴 틈 없이 날아들어 몸부림치게 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깊어지고 고민도 깊어지는 것이지요. 가을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더욱 절절하게 그리워지는 계절이지요. 지난 추석, 先山에 들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예순 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와 홀로 지내시다 아버지 곁으로 가신 어머니는 지금하늘나라에서 알 콩 달 콩 지내시겠지요.

 

맑고 화사한 햇살과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빛 때문에 산을 내려오는 길은 어느새 콧등이 시큰해지고 더없이 처량했습니다.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 한발자국도 움직이질 않았지요. 뒷전으로 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산 노을에 두둥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아버지 애창곡 이었지요. 한참을 듣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부모님을 만나니 모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행복했지요. 가을은 모든 게 풍성하고 마음도 넉넉해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려면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지요. 이러한 여유가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베푸는 마음이 필요하지요. 가을다운 삶이 이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 가득한 큰 마당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동네잔치가 벌어지기를 기대해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깊어가는 가을 저녁, 달님을 바라보는 소시민의 꿈이자 소박한 바람일 것입니다. 모든 근심걱정을 털어버리는 한바탕 큰 잔치가 벌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