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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 것도 酒道가 있다는데...

홍승표 2021. 3. 23. 11:3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에 관한 전설이나 떠도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리고 술에 관한 한 자칭 내로라하는 주당(酒黨)이나 주신(酒神) 또한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저 역시 술에 관한 한 많이 아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별로 아는 게 없는 바보 같은 사람이지요. 시골에서 자란 때문인지 들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의 새참 심부름을 하면서 일찍 술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참은 흔히 두부김치에 막걸리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술이 담긴 큰 주전자가 무겁기도 하거니와 술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두 모금씩 맛을 본 것입니다. 그리곤 기분이 좋아져 힘든 줄 모르고 심부름을 자청하게 되었지요.

 

열서너 살이 지나 농사일을 돕거나 땔나무를 할 때는 동네 형님들이 주는 술을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담배는 마주앉아 피는 것을 금기시했지만 술 마시는 것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지요. 정식으로 주도(酒道)를 배운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해였다고 기억합니다. 할머니 제삿날, 아버지는 “사내 나이 열일곱이 되었으면 술을 좀 해도 되지” 하시며 음복을 해보라고 권했지요. 짐짓 놀란 척했지만 속으로는 아버지도 제가 술 마시는 것을 알고 계셨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마운 일이었지요. 정말 고마운 것은 술도 음식이라 가려서 마시되 나름 주법(酒法)이 있다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전수해 준 것입니다.

 

윗분께 술을 올릴 때는 오른손으로 잔을 먼저 드리고 술을 따라 드리라는 것이 첫 번째였지요. 그리고 윗분이 주실 때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고개를 약간 돌리고 마시되 다 마시지 않을 때에도 잔에 입을 대었다가 잔을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잔을 부딪칠 때도 윗분의 잔보다 아래로 하고 반드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예의라고 했지요. 술을 철철 넘치게 따르는 것도 큰 결례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많아 자리에서 이동해서 술을 권할 때에도 반드시 오른쪽으로 가서 오른손으로 잔을 드리고 오른손으로 술을 따르라고 했지요. 술잔을 왼손으로 받아서도 안 되는데 왼손으로 술을 권하고 받는 것은 술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걸 지켜서 나쁠 건 없지요.

 

옛 선비들은 마을 정자에 모여 시 한수와 노래 한 자락에 술을 기울였습니다. 먼 산이나 강 자락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풍류를 즐긴 것이지요. 그러다 아는 선비가 지나가면 불러 함께 술자리를 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 선비는 인사를 나누고 한 순배가 돌아가면 자리를 떠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거지요. 그럴 때 잔을 왼손으로 건네면 그 잔을 받고는 자리를 뜨는 게 관례였던 것입니다. 왼손으로 건네는 술잔은 그런 의미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거지도 신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왕초 거지는 움막집 안에 앉아 동냥 얻어오는걸 먹으며 지내고 내초 거지는 왕초 시중을 들으며 지내고 초초 거지는 다른 무리들로부터 거처를 보호하는 일을 했지요. 신초 거지가 동냥을 얻어오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들도 가끔 고철이나 폐휴지 등을 판돈으로 고기를 사다 굽고 회식을 하지요. 그 때 왕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에겐 왼손으로 술을 따릅니다. 다른 곳으로 떠나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절대로 잔을 받지 않고 더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왼손 술잔의 의미를 아는 거지요. 이걸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술은 잘 마시면 약이 되지만 잘못 마시면 독이 될 수도 있지요. 술을 많이 마시는 것보다 분위기에 맞게 처신하는 게 잘 마시는 겁니다. 술자리를 통해 사람의 근량을 달아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지요. 저는 술에 관한 스승이 아버지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어느 술자리든지 결례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지요. 저도 아들 녀석에게 아버지의 주도(酒道)를 그대로 전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