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의 진정한 의미는 나눔
눈 시린 푸른 하늘 아래 산들이 저마다 다른 색동옷을 갈아입습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뒤뜰에선 후드득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귀뚜리 노랫소리에 맞춰 고추잠자리 한 무리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합니다. 옷깃을 세우고 낙엽 지는 벤치에 앉으면 곧 그림이 됩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아무 말 없이 낙엽 쌓인 길을 걷는 모습, 시인이나 철학자가 따로 있지 않아 보입니다. 가을살이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잘 여문 곡식처럼 넉넉해 보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마흔 살을 일러 미혹되지 않는 불혹(不惑)이라 하고, 쉰 살은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 예순 살은 이치에 통달해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이순(耳順)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어림없어 보입니다. 공자 때보다 평균수명이 한 20년쯤 길어졌다고 하면 마흔이 아니라 예순이 불혹인데, 그 나이면 정말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귀가 커지고 마음이 열려 은은한 달빛처럼 세상을 관조(觀照)하듯 바라보는 이순은커녕 나이가 들면 오히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마음이 상하고 작은 사탕발림에도 잘 넘어가 불혹에도 못 이르지 않던가요?
하늘에 박속같은 구름이 떠 있습니다. 산다는 것,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말없이 물었고, 구름도 어느새 말없이 사라졌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인생도 흘러가는 한조각 구름 같은 것일까?
가을은 매혹(魅惑)한 햇살과 하늘빛으로 깊어만 가는데 나도 너도, 우리의 삶은 그리 넉넉지 못한 듯합니다. 우리 조상은 달랐지요.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아놓고 한마당 큰 잔치를 벌였지요. 풍년을 이루게 해준 하늘과 조상께 감사드리고, 그동안 땀 흘린 노고를 서로 격려하고 자축했습니다. 더 가진 사람이나 덜 가진 사람이나 함께 어울려 넉넉하고 여유로운 가을을 만끽했지요. 곳곳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농악 소리 높여가며 동네 사람 모두 신명 나게 원을 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잔치는 동산 위에 뜬 달마저 술에 취해 불그레해질 때까지 늦도록 이어지곤 했지요. 하지만 세상이 달라져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코로나 19’까지 닥쳐 엎친 데 덮친 격이 됐지요. 올해는 하늘을 누렇게 뒤덮던 황사 현상도 나타나지 않아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 하늘을 되찾았는데, 그 더없이 화사한 얼굴을 반갑게 맞이할 수만은 없는 무거운 마음인지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을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지요. 흔들리는 갈대처럼 삶에 대한 의문부호가 쉴 틈 없이 날아들어 몸부림치게 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깊어지고 고민도 깊어지는 것이지요. 가을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더 절절하게 그리워지는 계절이지요. 지난 추석, 산소에 들어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예순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와 홀로 지내시다 아버지 곁으로 가신 어머니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알콩달콩 지내시겠지요.
맑고 화사한 햇살과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빛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오히려 무거웠습니다. 까닭 모를 처량함에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지요. 분명히 팔다리는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는 한 걸음도 옮겨지지 않더군요. 뒷전에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려 더욱더 그러했을 겁니다.
“산 노을에 두둥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아버지 애창곡이었지요. 한참 들었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 부모님을 만나니 모처럼 마음이 푸근했지요.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려면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유가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재산이든 지식이든 명예든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배려하고 베푸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많아져야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그것이야말로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겠는지요. 수확은 나눔에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 휘영청 밝은 달빛 가득한 큰 마당에서 한바탕 신명 나는 동네잔치가 벌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