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90년 된 순댓국처럼, 나도 진한 풍미가 나야 할 텐데…

홍승표 2021. 11. 7. 15:48

홍 과장! 어디 국밥 맛있게 잘하는 집 없나?”

경기도청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일을 할 때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도청 앞 네거리 중앙에 세운 경축 탑 점등식이 끝나자 지사께서 뜬금없이 국밥집을 찾았습니다. 물론, 스님들은 일찌감치 저녁 공양을 마치고 참석해 행사가 끝나자 바로 돌아간 후였지요.

순댓국 잘하는 데가 있는데 괜찮으세요?”

좋지!”

수원역 앞 골목에 있는 오랜 단골집이 생각나 그곳으로 안내했지요. 머리고기 한 점을 맛본 지사가 씩 웃으며 기분 좋은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집을 지들끼리만 왔었어? 막걸리 한잔해!”

7급으로 승진해 공보실에서 도정 홍보자료를 작성하는 일을 할 때입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토요일 날, 일과를 마치고 처음으로 일미집에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지요. 예약한 2층 다락방에 팀원이 모여 반주를 시작했는데 그게 길어졌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참나무 숯불에 소 등심 굽는소리로 들려 술맛을 더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술로 배를 채우고 몇 사람은 좁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 후, ‘일미집단골이 됐는데 값이 싸고 푸짐한 데다 맛이 최상이었기 때문이지요. 팀장이 되고 과장, 국장으로 일할 때도 매주 한두 차례는 들리곤 했습니다. 때로 퇴직한 공무원 선배나 기자를 이 집에서 만나게 되는 건 덤이었지요.

 

진성푸드라는 순대 공장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제품을 만들었다는 언론에 보도된 이후 순대집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진성 푸드 측은 "퇴사한 직원이 앙심을 품고 악의적인 제보를 한 것"이라면서 부인했지만 소비자들 반응은 싸늘하지요. 모처럼 위드 코로나 이후 영업이 활기를 찾았는데 순대 파문'이 터지면서 순대를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는 자영업자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아무 죄 없이 같은 업종이라는 이유로 유탄(流彈)을 맞은 꼴이지요. 다른 건 몰라도 먹는 음식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건 엄벌에 처해야합니다. 더구나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은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번 순대 파문은 전형적인 후진국 형 범죄행위입니다. 나라가 창피한 일이지요.

순댓국은 서민이 즐겨 찾는 음식입니다. 시골에서 자랄 때, 잔칫날이면 돼지를 잡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돼지 창자에 고기·야채·두부 등을 다져 넣고 만든 전통 순대와 순댓국은 술안주로도 최고였지요. 여기에 밥을 말아 먹는 순대국밥은 별미였습니다. 순대국밥이 그런 음식으로 인식돼 있는지라 가끔 서민 흉내 내려는 정치인이 순댓국집을 찾는 쇼를 벌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먹어서야 제 맛이 나겠는지요. ‘일미 집은 순댓국의 성지처럼 소문이 나 있는데 그 명성은 90년 세월 동안 겹겹이 쌓인 맛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이집엘 40년을 다녔습니다. 수원 역 앞을 지켜온 세월도 어느덧, 자그마치 90년 된 집이지요.

 

저는 가끔 기분이 우중충한데 비가 내려 이유 없이 처량한 생각이 들 때면 터벅터벅 순댓국밥집에 가서 막걸리 한잔을 기울입니다. 그러면 세상 근심이 사라지고 입 꼬리가 올라가지요. ‘혼 밥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식당입니다. 한 그릇을 시켰다고 눈치를 주지 않으니까요.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이시네요.”

하긴 처음 간 게 거의 40년 전이었으니 저도 오래 끓인 순댓국 같겠지요. 모쪼록 저에게도 푹 끓인 순댓국처럼 진한 풍미가 있으면 좋겠네요. 90년이나 된 순댓국밥집은 흔치 않은데, 40년을 단골 음식점이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10년 후면 100년이고 저는 50년 단골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