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일을 하지만, 땀 흘려서 번 이 돈만큼은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악산을 지키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임기종 씨는 40년이 넘도록 설악산에서 지게로 짐을 나른 지게꾼이지요. 자신이 지게를 짊어지지 않으면 설악산 휴게소 상인들이 장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도 부르지요. 자그마한 체구로 일해서이기도 하지만, 지게로 짐을 나르고 받은 품삯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동안 장애인학교와 장애인 요양 시설에 생필품을 지원해 왔지요. 홀몸노인들을 보살피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이 번 돈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것도 40년 넘게 모은 품삯 1억 원을 이웃에게 기꺼이 기부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지게로 짐을 지고 설악산을 한 번 오르고 받는 품삯이 3만 원이니까 설악산을 3천 번 이상 오르내린 품삯을 기부한 셈입니다.
설악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상인들과 사찰에 필요한 생필품을 져다 주고 그가 받는 품삯은 한 달에 150만 원 정도입니다. 여기에 아내가 정부로부터 받는 장애인 생활 보조비를 조금 보태지만, 살림에 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지요. 더욱이 고된 노동을 통해 받은 품삯은 지적장애 2급인 아내와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아들을 부양하는 데 주로 써야 하므로 이를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하는데, 그 힘들게 번 돈을 기부한 것이니 참으로 고개가 절로 숙입니다. 하지만 그는 "술·담배를 안 하고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으니 먹고사는 데 불편이 없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지게를 지는 요령을 몰라 작대기를 짚고 일어서다가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그만둘 생각도 했죠. 하지만 배운 게 없고 다른 재주가 없으니 막일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그때는 내 몸뚱이 하나 살아내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부모님은 그가 열 살이 갓 넘었을 때 연달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으니 남겨진 재산도 없었지요. 두 분이 돌아가신 후, 6남매는 자기 먹을거리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셋째였던 그도 초등학교 5학년도 못 마친 채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했지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내다 그나마 정착한 노동이 오늘날의 지게꾼 일입니다. 열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설악산에서 50년간 짐을 져 날랐지요.
그는 맨몸으로 걸어도 힘든 산길을 40kg이 넘는 짐을 지고 날마다 오르내립니다. 하루에 적어도 4번 이상은 다니지요. 가스통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릴 때도 있고, 100kg이 넘는 대형 냉장고를 통째로 옮겨야 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는 체격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닙니다. 일흔 나이를 향해 치닫는 그는 이제 머리도 허허해졌고 치아는 거의 빠지거나 삭아서 발음까지 어눌하지요. 그런 그의 선행은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대통령 표창조차 왜소하게 느껴지는 게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겁니다. 가진 게 적다고 아등바등 살아온 지난날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그런데 그의 선행이 방송을 탄 후, 청와대 게시판에 "설악산 국립공원의 마지막 지게꾼이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국민청원이 올라왔습니다. 논란이 벌어지자 그는 "설악산에서 짐 안 질 것"이라고 했지요. 걱정을 해준다는 게 일거리를 잃게 만든 셈입니다. "설악산은 내 부모같이 품어주고 안아주고 푸근하다. 산에 가면 편안했다"고 한 그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일부시민들이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에 그를 채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쉽지 않은 일이지요. ‘설악산 산신령’ 임기종 씨가 어떤 길을 가든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그의 메아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