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에서 문화정책과장으로 일할 때, 함께 일하던 예술계 차석이 사무관 승진내정자로 발표됐습니다. 그 날 저녁, 그는 강원도 철원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지요.
“사무관? 창수야, 그게 뭐니?”
“아버지! 우리 동네 군청 과장 아시죠? 저도 교육받으면 그리되는 거예요.”
“그게 좋은 거냐? 도청에 있는 게 좋은 거 아니니?”
6·25 때 내려온 분이라 사무관을 잘 모르는 게 당연했습니다.
“아버지! 그게 우리 동네 면장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 경사 났구나! 이번 주말에 내려오너라!”
그 당시 오전근무였던 토요일, 그가 반가를 내고 철원으로 향했지요. 마을 입구에 ‘경축 이ㅇㅇ의 장남 이창수 면장 승진’이라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돼지를 잡고 많은 동네 사람을 초청한 것이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면장 됐다고 술잔을 건네니 쑥스럽기도 했지만, 부모님과 온 동네 사람이 좋아해 주니 주는 대로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숙취가 미처 사라지기 전에, 친척들이 들이닥쳐 또 술을 마시게 됐으니 급기야 녹초가 되고 말았지요. 다음 월요일, 그 얘기를 듣고 ‘논두렁 기라도 타고나야 된다는 면장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함께 웃었습니다.
아버지 삼형제는 고향인 광주곤지암에서 살았지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큰아버지는 대쪽 같은 성격에 꾸지람을 자주 해 모두 무서워했습니다. 그 큰아버지가 공무원인 형이 시청에서 일하다가 고향의 면장으로 발령을 받아 일하게 되자 ‘홍 면장’이라고 불렀지요. 군청 계장일 때까지는 이름을 불렀는데 호칭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저는 고향인 실촌면 면서기로 발령받았을 때, “승표야, 열심히 잘해서 면장까지 해!”라고 하셨던 아버지가 생각났지요. 형 덕분에 우리 집은 ‘면장 댁’으로 불렸습니다. 형은 시청에서 국장으로 퇴직했는데,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홍 면장이라고 부르지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면서기로 일할 때, 면장은 당시만 해도 귀했던 90cc 전용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나는 언제 전용 오토바이를 탈 날이 올까?’ 생각했지요. 1995년 사무관으로 승진했으나 면장은 못해보고 고양, 의왕시청 공보담당관으로 일하다가 도청으로 복귀했습니다. 훗날 파주시 부시장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 탄현면장 취임식에 참석했지요. 그 자리에는 이 지역출신 국회의원과 도의원, 시의원, 농협 조합장과 전직 공무원 등 많은 축하객이 함께 했고, 축하 화환도 즐비했습니다. 허울은 그럴듯하지만 객지에서 온 부시장보다 이 지역출신 면장이 실세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긴 민선시장 관점에서도 잠시 머물렀다가는 부시장보다는 읍, 면, 동장이 더 중요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면장이 잘 못 하면 주민들 민원이 생기고, 다음 선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농촌 지역에서 일하는 면장은 한동네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모든 애경사에 참석하고, 나들이에도 함께 하지요. 직급은 같은 사무관이지만, 면장은 어엿한 기관장입니다. 자기 소신대로 행정을 펼칠 수도 있으니 지역 어른인 셈이지요. 면장만큼 보람 있는 보직이 없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듯합니다.
공무원의 꽃은 사무관이지요. 말단 9급에서 사무관이 되려면 족히 20년 넘게 걸리는데 보직은 면장이 최고입니다. 면장 댁은 번지 없이도 우편물이 배달될 정도이지요. 학교 총동문회에 가도 부시장이었던 저보다 고향 면장이 먼저 소개받고 더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면장이 주는 상징성은 생각보다 크지요. 면장은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퇴직 후에도 동네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 도의원, 시의원, 부단체장, 국장보다 더 좋은 예우를 받지요. 이유 불문, 아버지의 바람이었던 면장을 못한 불효자식(?)이니 꿈속에서라도 면장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