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과장! 어디 국밥 맛있게 잘하는 집 없나?"
경기도청에서 의전담당과장으로 일할 때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도청 앞 네거리 중앙에 ‘경축 탑 점등식’이 끝나자 손학규 지사가 뜬금없이 국밥집을 찾았지요.
"순댓국 잘하는 데가 있는데 괜찮으세요?" "그것도 좋지!"
수원역 앞 골목에 있는 오랜 단골집이 생각나 그곳으로 안내했지요. 머리고기 한 점을 맛본 지사가 씩 웃으며 기분 좋은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집을 지들끼리만 다녔어? 이리와 막걸리 한잔해!"
‘82년 청운의 뜻(?)을 품고 도청으로 와서 이 집을 다니기 시작했지요. 도정 홍보자료를 작성하는 일을 할 때입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토요일 날, 일과를 마치고 ‘일미 집’에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지요. 2층 다락방에 모여 반주(飯酒)를 곁들였는데 그게 길어졌습니다. 빗소리가 ‘숯불에 소 등심 굽는 소리’로 들려 술맛을 더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술로 배를 채우고 몇 사람은 가파른 나무계단을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제가 ‘일미 집’ 단골이 된 것은 값싸고 푸짐한 데다 맛이 최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도청에서 일하는 동안엔 내 집처럼 들락거렸습니다. 때로 퇴직한 공무원 선배나 기자를 이 집에서 만나는 건 덤이었지요.
얼마 전, ‘J 푸드’라는 순대 공장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제품을 만들었다는 언론보도이후, 순대집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J푸드 측은 "퇴사한 직원이 앙심을 품고 악의적인 제보를 한 것"이라고 했지만 소비자들 반응은 싸늘했지요. 모처럼 코로나19 규제완화로 영업이 활기를 찾았는데 ‘순대 파문‘이 터지면서 순대를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는 자영업자들까지 피해를 보았습니다. 아무 죄 없이 같은 업종이라는 이유로 유탄(流彈)을 맞은 꼴이지요. 다른 건 몰라도 먹는 음식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건 엄벌에 처해야합니다. 더구나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은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런 건, 전형적인 후진국형 범죄행위입니다. 나라 창피한 일이지요.
순댓국은 소탈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입니다. 어린 시절, 잔칫날이면 돼지를 잡아 손님을 대접했지요. 돼지 창자에 고기·야채·두부 등을 다져 넣고 만든 순대와 머리고기는 술안주로 최고입니다. 밥을 말아 먹는 순댓국 은 별미지요. 많은 이들이 순댓국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소탈한 서민 흉내 내려는 정치인이 순댓국집을 찾아 생쇼를 펼치는데 그렇게 먹어서야 제 맛이 안 나지요. 순댓국의 성지처럼 소문나있는 ‘일미 집’의 명성은 90년 동안 겹겹이 쌓인 맛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결정체입니다. 이집엘 40년이나 드나들었지요. 요즘엔 가끔 아들내외, 손주들과도 이집을 찾습니다. 3대가 단골이 될 수도 있는 집이지요.
가끔 기분이 우중충한 날에는 작은 다락방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기울입니다. 고달픈 삶의 더께를 한 잔 술로 씻어버리면 어느새 세상 근심이 사라지고 입 꼬리가 올라가지요. ‘혼 밥’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식당입니다. 한 그릇을 시켰다고 눈치를 주지 않으니까요.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는 게 실감나네요."
엊그제 주인장이 저를 보더니 무심히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하긴 처음 간 게 40년 전이었으니 제게도 오랜 풍상(風霜)을 거친 연륜이 엿보이겠지요. 저에게서도 오래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진하고 넉넉한 인간미가 풍기면 좋겠습니다. 90년이나 된 순댓국집도 흔치 않지만, 이집을 만나 40년 단골이 된 건 행운이지요. 10년 후, 이 집은 100년이 되고 저는 50년 단골손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