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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글쟁이의 추억^^

홍승표 2023. 1. 30. 10:20

홍비서! 이 자료 좀 봐! 도대체 앞뒤가 연결이 안 되네.”

새마을 회에서 주관하는 이웃돕기 바자에 참석하기 위해 파주로 가는 도중, 임사빈 지사가 자료를 건네며 한마디 던졌습니다. 축사였는데, 읽어보니 새마을역사(歷史)같은 자료를 꿰맞춘 것이고 핵심이 없었지요.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지도자들의 어려운 이웃돕기는 큰 의미가 있고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일이 널리 확산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첨삭(添削)했지요. 수정 자료를 넘겨받은 지사가 홍비서 대단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앞으로 말씀 자료는 홍비서가 검토하는 게 좋겠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흘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 ·국장 간부회의가 끝나고 지사께서 저를 찾는다고 했지요. 회의실로 급히 갔더니 지사가 간부들이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모든 행사의 축사나 기념사는 홍비서 검토를 받으라.”고 지시했습니다. ‘홍비서가 검토했다는 서명이 있으면 믿고 결재하겠다.’는 사족(蛇足)을 달았지요.

말씀자료는 행사를 주관하거나 업무관련부서에서 작성해 지사결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지사가 바쁜 일정 속에서 자료를 일일이 읽어보고 결재하는 과정에서 다듬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어쨌든 이들 자료를 수행비서가 분류해 행사 때 단상에 올려놓습니다. 당연히 행사의 취지에 맞아야 하고, 도정의 비전도 담겨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지요. 심지어 기초적인 기승전결조차 갖추지 못한 자료가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글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실무자는 곤혹스럽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어렵게 완성한 글도 과장, 국장을 거치면서 크게 바뀌곤 하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지기는커녕 각자 자기 생각을 첨삭해 중구난방이 됩니다. 무엇보다 지사의 도정 철학과 의중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지요. 그러니 지사로서는 매일 함께 다니는 수행비서가 검토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당신 마음에 들게 글을 쓴다면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지사의 지시 이후 각 부서에서 비서실로 말씀 자료가 몰려들어 정신 차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틈틈이 읽으면서 다듬었지요. 초안 작성자 생각을 존중해 보통 첨삭 정도를 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만, 아예 새로 쓸 때도 있었습니다. 담당 부서에서는 좋아했지요. 결재 시간이 짧아진데다가 비서실에서 지사 결재까지 받아 주니 일이 한결 수월해졌기 때문입니다.

 

관선 지사 다섯 분을 모시는 동안 말씀자료를 검토하는 일을 했지요. 개성이 다르고 도정 철학도 달랐지만, 비서로서 가까이 대하니 지사의 도정철학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힘들기는 했지만 보람 있었지요. 말씀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 부서 일을 알게 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공무원들과 가까워졌습니다. 6년 넘게 그 일을 하다 보니 도정의 흐름도 거의 꿰뚫을 수 있었지요. 사무관으로 승진해 잠시 비서실을 떠난 적도 있지만, 민선 시대에 들어서도 비서실에 다시 배치돼 두 분 지사를 모신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8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속칭 문인이지요. 처음엔 신춘문예에 당선된 나름 글쟁이인데 말씀자료를 고치라고?...’ 불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곱 분의 지사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말씀자료를 다듬는 건, 공부도 되고 좋은 자산이 되었지요. 그 경험이 훗날 과장, 국장으로 일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고 공직생활에 좋은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많은 선후배와 교분을 맺었고 지금도 도청 공무원을 가장 많이 알고 지낸 사람으로 평가받는 연유이고 자산이지요. 어떤 일이든 공들여 정성을 다하면 그 열매는 알차고 풍성하게 맺어지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