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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는 不滅의 神입니다.^^

홍승표 2023. 4. 30. 23:11

1970년대만 해도 끼니를 걱정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쌀을 봉지에 담아 나간 후, 빈손으로 돌아왔지요. 그러다 ‘우리도 궁색한 처지에 다른 집 돕는 게 가당한 일이냐?’는 엄마 역정에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습니다. 우리 살림도 녹록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부모님이 크게 다투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았고 해거리로 논밭을 팔아가며 6남매를 공부시켰지요.

"여보! 공부를 못하면 몰라도 공부 잘하는 애를 어떻게 고등학교를 안 보내요?" 6남매는 공부를 제법 잘했는데, 부모님은 그게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땐 잘사는 집도 중학교만 보내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요.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자식들 때문에 남보다 더 고생하신 겁니다. 어둠이 내리는 우물가에 앉아어깨를 들먹이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본적이 있지요. 덩달아 눈물이 쏟아져 방으로 들어가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3 여름방학 때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졸업 전, 발령을 받았는데 입을 옷이 없었습니다. "잘해서 면장까지 해라!" 아버지는 동대문시장에서 옷을 사주며 저를 다독였지요.

"참 대단한 일이고 고맙다. 사람들이 우리 동네 인물 났다고 하더라!"

‘88년 신춘문예에 당선돼 인사갔을 때, 칭찬이나 사과에는 인색하셨던 아버지의 그 말에 콧등이 시큰해졌지요. 그런 저를 보고 "미안하다. 너는 꼭 대학에 보냈어야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연세대주최 전국고교생 문예공모 당선으로 특례입학특전이 주어졌는데도 못 보낸 게 미안했던 것이지요. 지켜보던 엄마도 눈매가 붉어진 것을 보며 너무나 황당하고 죄송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인정 많고 남을 잘 배려하는 멋쟁이셨지요. 술 드신 날엔 이미자의 ‘황포돛대’나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부르며 집으로 오셨습니다. 제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술 잘 마시는 법(酒法)을 가르쳐주셨지요. 어렵고 큰 산 같던 아버지가 달라보였고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배움이 짧고 힘겹게 살면서도 내일을 생각할 줄 아는 분들이었지요. 논밭을 팔아가며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동네 사람들로부터 ‘미친 거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으니 그 또한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저와 형, 여동생이 공무원이 돼 형편이 나아질 무렵, 예순 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지요. 엄마는 이천의 철물점집에서 어려움 없이 자랐는데, 가난한 시골총각에게 시집와 6남매를 낳고 살았으니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도 현명하고 살뜰하게 살림을 하셨으니 아버지나 우리 6남매가 복 받은 것이지요.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쓸쓸히 지내시다 일흔다섯에 아버지 곁으로 떠났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두 분이 알 콩 달 콩 지내시겠지요. 저는 승진이나 자리를 옮길 때면 부모님을 찾아 인사올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곧추세우곤 했습니다.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한 것이지요.


어버이는 살아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시공간(時空間)을 초월해 든든한 버팀목이고 가르침을 주는 불멸의 신(神)입니다. 그런데 살아생전,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이나 따뜻하게 안아드린 일이 없으니 한스러울 따름이지요. 저도 아버지가 되어보니 부모님이 가슴 저리도록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기쁘거나 슬플 때는 더더욱 간절히 뵙고 싶어지지요. 그런데 뵐 수도 안아드릴 수도 없으니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식이 봉양하려하지만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子欲養而親不待)’는 말이 있지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공들여 정성으로 잘 모셔야하는 이유입니다. 어버이날이 따로 있을 수 없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모두 어버이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