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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에 삶의 더께를 씻고^^

홍승표 2023. 7. 4. 08:45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소고기 등심 굽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지요. 창밖에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부딪치는 빗소리를 실로폰에 비유하고, 또 다른 이는 작은북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저는 배고픈 것도 아닌데 등심 굽는 소리나 호박전 부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눈 비비고 일어나 눈을 감으면 너른 고을(廣州)에서 지내던 기억들이 무지개처럼 떠오르지요. 비가 오면 동네 형들과 어망을 둘러매고 개울로 나갔습니다. 물살이 빨라지면 고기들이 얕은 물 가장자리로 나오기 때문에 잡기가 쉽거든요. 물이 불어나면 다양한 잡고기를 잡아 끓여 먹을 수 있어 신이 났습니다.


손질한 고기와 새우를 넣고 고추장을 풀어 끓인 매운탕 맛은 시원하고 달달하지요. 밥을 말아 먹어도 좋고, 국수를 넣거나 수제비를 넣어 끓여내도 좋고, 매운탕은 시원하고 달콤한 국물이 최고입니다. 장마철 시골마을에서는 이렇게 고기를 잡아 집집 돌아가며 매운탕을 끓여 먹었지요. 잡히는 물고기가 그때그때 다르고 집안마다 양념도 달라 맛이 저마다 다르기는 했지만, 어느 집이나 정성으로 끓인 매운탕은 맛있었습니다. 저는 동네 형들과 함께 어울리고, 어른들과 식사를 같이하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인생 공부를 미리 한 셈이니 행복했습니다.


빗줄기 속에는 눈물도 들어 있지요. 부모님은 장남이 잘돼야 집안이 제대로 선다고 형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때, 서울에 유학을 간다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지요. 형이 첫 번째 대입 시험에 떨어져 다시 공부할 무렵 저는 고교진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수는 어려운 일, 부모님은 돈 들어갈 일이 걱정이었겠지요. 제가 학교 가는 것보다 농사일을 도우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희뿌연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앞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른 봄비가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지요. 저도 모르게 멍 때리며 빗속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는 쏟아지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들, 온몸이 비에 흠뻑 젖고 축 늘어져 돌아온 아들을 본 엄마는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하지만 돌아온 건 벼락같은 호통소리였습니다. 그리곤 엄마는 부엌에서 어깨를 들먹였고 저도 방으로 들어가 숨죽여 울다 잠들었지요. 엄마도 둘째가 왜 비를 맞으며 청승맞게 떠돌았는지 알았으니 그걸 감추려 겉으론 호통을 친 것입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고 고마운 마음으로 농사를 도우며 공부할 수 있었지요.


"승표 형! 날궂이 하십시다."

경기도청에서 일할 때, 비오는 날이면 전화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늘 수원시청 옆에 있는 ‘이모네 조개구이’에서 만났는데,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곤 했습니다. 서비스 안주로 계란말이와 미역국을 먼저 주는데, 그걸로 시동을 건 것이지요. 거나하게 술이 오르면 뜨끈한 홍합탕이 속을 달래줍니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빗줄기도 장단 맞춰 굵어지면 목소리도 커지고 이야기보따리가 거미줄처럼 끝도 없이 풀려나왔지요.


불볕더위 속에서 요란하게 날아드는 새소리, 쓰르라미 소리는 더위에 지친 눈까풀을 내려앉게 합니다. 그런 날,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면 정신이 번쩍 들고 찌든 삶의 더께가 말끔히 씻겨 내리지요. 비가 오시는 날, 우두커니 창가에 앉아 빗소릴 듣는 시간은 행복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비 오는 날’이 아니라 ‘비 오시는 날’이라고 하는지도 모르지요.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 아니라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의문부호를 떠올리며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있는 보약 같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