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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손자^^

홍승표 2023. 10. 29. 22:28

손자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을 잡고 목욕탕엘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온탕에 들어가 앉으며 한마디 날렸지요.

 

"! 시원하다."

 

뒤 따라 들어간 아버지도 "어유! 정말 시원하네요."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시원하다는 소리를 들은 손자가 아무 생각 없이 온탕 속으로 뛰어 들었지요.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란 손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습니다.

 

"아 뜨거워!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깡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 날, 아버지와 술을 거나하게 걸친 할아버지가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방 모퉁이에 놓아둔 자리끼가 텅 비어 있었지요. 아버지가 홀라당 마셔버린 겁니다. 화가 난 할아버지가 아들을 깨워 물을 가져오라고 다그쳤지요. 할머니에게 말했다간 혼쭐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살짝 문을 열고 소리쳤지요.

 

"여보! 여보! 물 좀 갖다 줘요."

 

사랑방에서 곤히 잠자다 깬 어머니의 속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남편을 골탕 먹이려고 화로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밖에 두었다가 문 앞에 갖다놓았지요.

 

물을 들여 놓자마자 할아버지가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물이 너무 뜨거웠지요. 주전자는 차갑지만 물은 식지 않았던 겁니다. "? ! 어유..."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챙겨 준 물을 뜨겁다고 소릴 지를 수 없어 묵언에 가까운 소릴 내곤 누웠지요. 이번엔 아들이 일어나 물을 들이키곤 기절할 듯 놀랐습니다. ‘아니! 이 뜨거운 물을 마시고도 말없이 조용히 누우셨다고?’ 놀라 자빠질 뻔 했지만 이를 악물고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지요. 잠이 깬 손자가 나도 물먹고 자야겠다.’고 들이키다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이 XX! 뜨거우면 뜨겁다고 얘기해야지..."

너른 고을(廣州)에서 자란 저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목욕탕엘 함께 가본 일이 없습니다. 시골이라서 동네에 목욕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여름철에는 저녁을 먹고 냇가로 나가 등목도 하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습니다. 겨울에는 가마솥에 물을 데우고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채워 목욕을 했는데 그나마도 그리 자주하지는 못했지요. 고향집은 방이 세 개라서 안방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마루건너 방에 할머니,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자고 부엌 옆방에 형제들이 잤으니 뜨거운 자리끼 사건은 경험해보질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안방은 부모님, 건넛방은 여동생, 부엌 옆방은 형제들 몫이 되었지요.

 

추석 전날, 아들 손자와 목욕탕엘 함께 갔습니다. 아들과는 가끔 목욕탕엘 갔는데 코로나19로 한동안 가질 못했지요. 처음으로 손자 녀석까지 함께 가니 묘한 설렘과 기쁨이 느껴졌습니다. 휴게실에서 구운 계란과 우유를 마시고 서로 등도 밀어주고 함께 한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지요. 아들 손자와 함께 목욕을 하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게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엿새 동안의 긴 연휴, 오곡백과와 먹을거리 넘쳐나는 한가위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웠지요. 삶의 기쁨과 행복감이 넘쳐흐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에게 할아버지는 무서웠고 아버지는 어려운 존재였지요. 억눌려 자란 탓인지 아들에게 살갑게 해주질 못했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지요. 아들은 손자와 함께 목욕도 다니고 스킨십도 자주 하면서 귀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걸 하며 사는 아들과 손자가 살짝 부럽고 고맙다는 생각이지요. 이제 손자 귀엽다는 걸 실감하며 지냅니다. 목욕탕에서 아들, 손자와 함께 한 시간이 지금도 삼삼하지요. 아들, 며느리, 손주들과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보름달처럼 티 없이 밝고 둥글고 넉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