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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면 보물, 잘 못쓰면 고물^^

홍승표 2024. 2. 26. 08:49

"자치행정국장인데요. 갑자기 소리가 너무 커졌네요? 소리 좀 줄이라고 하세요." "그러게 말예요. 그걸 어디에 말해야 되나요?"

전화 받은 사람은 당연히 청원경찰일 텐데 느낌이 싸했습니다.

"누구세요?" "정무부지사입니다. 국장님!"


경기도청 자치행정국장으로 일할 때입니다. 청사관리와 방호담당 부서장이었는데, 며칠 동안 도청 정문 앞에서 전국철거민연합의 집회가 이어졌지요. 확성기를 이용해 목청을 높이고 심지어 장송곡(葬送曲)까지 틀어대는 통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소리가 커져 여비서에게 정문을 대라고 했는데 뜬금없이 정무부지사가 연결된 것이지요.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정문을 정무부지사로 들은 듯했습니다. 황급히 전화를 끊고 정무부지사실로 뛰어 내려갔지요.

"부지사님! 죄송합니다. 여비서에게 정문을 대라고 했는데 소음 때문에 잘못 알아들은 듯합니다." "아! 그렇게 된 일이네요. 저도 홍국장님이 소리를 줄이라고 해서 조금 당황했는데 그럴 수도 있지요. 오신 김에 차나 한잔하고 가세요."


유연한 생각을 지닌 KBS보도본부장 출신의 유연채 부지사가 이해해 주는 바람에 이 해프닝은 웃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한마디 들을 줄 알았는데 잘 넘어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양덕이 좀 대줘요"

며칠 후, 국(局) 서무 일을 하는 박양덕 주무관을 대라고 했더니 여비서가 후다닥 뛰어나갔습니다. 전화 연결을 부탁했는데 갑자기 뛰어나가니 의아했지요. 하는 수 없이 직접 전화를 연결해 용건을 끝냈는데 잠시 후, 여비서가 양동이를 들고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웬 양동이?" "국장님이 양동이 찾으신 거 아네요?" "양동이? 양덕이 전화 대라고 한 건데…" "그래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잘 알아듣게 말을 해야 되는데…"

양동이를 구하러 별관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을 뛰어갔다 온 여비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구내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후로 전화 연결은 명확하게 조심해서 했고, 될 수 있으면 직접 할 때가 많았지요.


이재창 지사 시절, 며칠이나 노총회장 전화 연결이 안 되다가 여비서가 전화를 받고 지사께 연결시켜 드렸습니다. 그런데 통화를 마친 지사가 비서실장과 저를 부르더니 "여직원 전화 교육 좀 똑바로 시키라"고 호통을 쳤지요. 알고 보니 전화주신 분이 노총회장이 아니라 ‘노재봉 전 총리’였던 것입니다. 여직원이 한동안 노총회장 전화를 기다리다가 ‘노 총리’라는 말을 노총회장으로 듣고 연결시켜 드린 것이지요. 그날이 오전 근무를 하는 토요일이었으니 망정이지 평일이면 온종일 불편할 뻔했습니다.

저는 친구나 아랫사람에겐 말을 놓지만, 문자메시지는 존댓말을 쓰지요. 그게 낯선지 "갑자기 웬 존댓말이냐?"며 불편해하거나 "화난 일이 있느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존댓말을 쓰는 게 마음이 편하고 나름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 옛날, "별일 없지? 잘 지내라!" 타향살이하는 저를 격려해주던 부모님 전화는 울컥하면서도 삶을 곧추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핸드폰이지만 누구나 잘 쓰는 건 아니지요. 전화는 잘 쓰면 보물이고 잘 못쓰면 고물이 됩니다.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