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표야! 다시 내려가자." "아니야! 천천히 올라가면 돼"
관선시절, 도지사 비서실에서 휴일도 없이 다섯 분의 지사를 모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 사무관 승진을 위해 고양시로 발령을 받았지요.
그때, 사무관급 이상 인사권은 도지사가 전권을 쥐고 있었고 사무관 승진을 하려면 시군에서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어렵사리 승진시험에 합격, 공보담당관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산행을 나선 게 치악산이었습니다. 구룡사를 지나 사다리병창을 오르는데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지요.
예전에 지게로 땔나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렸던 자신감은 가물가물, 몸이 따라주질 않았습니다. 그때, 친구 녀석의 뼈 때리는 한마디에 오기가 생겨난 거지요.
비서실에서 일하면서 운동을 못한 게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어금니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산을 오르고 또 올랐지요.
‘치가 떨리고 악! 소리가 나는 산’이란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실감 했습니다. 치악산마루인 비로봉에 이르러서는 결국 눕고 말았지요.
탈진 상태에 이른 저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아내가 싸준 김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꿀맛 같은 시간이었지요. 보약 같은 휴식을 끝내고 내려올 때는 가장 짧은 코스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치악산을 다녀온 며칠 동안은 종아리는 물론 허벅지까지 근육통이 와 애를 먹었지요. 그 후, 시간 날 때마다 광교산을 찾아들었고 등산에도 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산에 들면 세상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걸 느꼈지요.
사람들과 어울려 산에 드는 것도 좋지만 홀로 산에 드는 게 오롯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상상 속으로 날아다닐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해가 솟아오르기 전, 여명(黎明)의 숲길은 새로운 세상을 느끼며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보석 같은 시간이 되었지요.
어둠속에 숨죽이며 눈을 뜨는 그 산자락과 그 숲의 적막 속에서 생명의 불씨를 당겨 순은(純銀)의 매듭을 풀고 알몸으로 깨어나는 새벽은 참 신비로웠습니다. 그 순간 문득, 지금 잘 살고 있는 건지 물음표를 던져보곤 했지요.
안개에 젖은 바람결을 맞으며 산마루에 오르면 멀리서 솟구치는 햇덩이를 만나곤 했습니다. 온 누리에 아지랑이 춤추고 새들의 노래 소리가 절창인 봄날, 옹골찬 마디마디 잎이 나고 흐드러지게 꽃들이 피어났지요.
숨죽이고 바라보는 숲길에는 부챗살 이우는 가지마다 새살 돋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무지갯빛으로 날아다녔습니다.
금촉 은촉 바람이 불고 이름 모를 새 소리, 잊었던 풀벌레 소리가 합창으로 어우러지고 빛 부신 메아리가 되어 산허리를 휘돌았지요.
저도 나무가 되고 돌이 되고 숲이 되고 산이 되었습니다. 구름 되고 바람이 되어 초록 물결 넘실대는 산을 신명나게 날아 다녔지요.
충혈 된 꽃망울들이 앞 다투어 피어나고 젖빛 뽀얀 햇살자락이 눈웃음을 날리면 마음은 쪽빛 창(窓)이 되고 한마디 말은 시어(詩語)가 되었습니다.
꽃 물진 자락마다 햇무리 벅찬 숨결로 무지개를 걸어 놓고 하늘도 산을 내려와 햇덩이를 품었지요. 새 봄날, 새벽 숲길은 삶의 더께를 씻어내는 한줄기 빛이요 희망이었습니다.
산마루에 올라 한그루 나무로 서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옹다옹 살지 말고 품격 있게 살아야지’다짐하곤 했지요.
하지만 산을 내려오면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산에 들어 그런 생각을 가져보는 게 행복했지요. 삶의 가치를 더하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새 봄날, 새벽 숲길에는 옹골찬 마디마디 잎이 나고 시나브로 꽃이 피어나지요. 새 생명이 깨어나는 숲길에서 저도 싱그러운 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