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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저리게 그리운 사람^^

홍승표 2024. 4. 23. 08:54

 

여보!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울부짖는 아내의 목소리로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것은 프랑스의 어느 호텔방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TGV를 타고 밤늦게 도착해 잠 든 날, 새벽에 비보를 접하곤 넋을 놓아버렸지요. 숨이 멎을 듯하고 몸이 굳어버리고 두려움이 몰려들었습니다.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하늘 길은 평생 가장 지루했던 시간이었지요. 온몸이 떨리고 사지가 굳어져 기내식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물만 들이켰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지요. 평생을 고생만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진 게 없는 시골총각에게 시집와 고생고생하며 살았지요. 그리 많지 않은 땅을 일구면서 6남매를 키우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았습니다. 죽어라 일했지만 많지 않은 논밭으론 한계가 있었지요. 자식들이 학교엘 다니기 시작하자 살림을 꾸려가는 게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집 아이들은 중학교는 꿈도 못 꾸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그런데도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날품팔이하고 해거리로 땅을 팔아가며 6남매를 고등학교이상 공부시켰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제 정신 아니라는 비아 냥을 들은 연유이지요.

어느 날, 땅거미가 내리는 늦은 저녁에 들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곤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어깨를 들먹이는 게 울고 계시다는 걸 직감했지요. 죽어라 일을 하고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는데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질 않으니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울다가 돌아서는 어머니 보기가 안쓰러워 방으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지요. 가끔 아버지,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어깨를 들먹이는 걸 보면 가슴이 터질 듯 아팠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학교가 끝나면 땔나무를 하고 소꼴도 베고 농사일도 거들며 부모님을 도왔지요. 부모님은 맏이가 잘 돼야 한다며 형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진학마저 포기하기에 이르렀지요. 고등학교를 안 가는 게 효도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래로 네 명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집안일을 돕는 게 숙명이라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해 뒤늦게 고등학교엘 들어갔습니다. 인생의 변곡점이었지요.

 

어려운 형편에 진학시켜준 부모님이 너무 고마워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저의 모습을 대견스러워 했지요.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꾀를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엔 하루 두 번 땔나무를 했지요. 점심에 어머니가 제 밥그릇에만 달걀을 넣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동생들에겐 살짝 미안했습니다. 그 후 저와 형, 여동생 셋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형편이 나아질 무렵, 아버지가 예순 둘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셨지요. 홀로 되신 어머니는 망연자실 눈물로 보내셨습니다. 말년에는 당뇨에 약간의 치매 증세마저 보였지요.

 

유럽 출장 전, 뵈었을 때만해도 그리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황망함속에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모시고 돌아서는 뒷전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지요. 질곡의 세월을 치열하게 그러나 공들여 정성으로 사는 어머니의 존재는 경이로웠습니다. 어머니의 그 몸짓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으로 스며들어 제 삶을 곧추세우는 자양분이자 가치관이 되었지요. 다시 태어난대도 부모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가슴 저리고 몸서리치게 그리운 사람, 바로 어버이지요. 늘 심장을 뛰게 하는 아버지! 어머니!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생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