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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

홍승표 2024. 6. 24. 08:58
초등학교 6학년 가을 날 저녁, 아버지는 형과 저를 가설극장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극장이 없던 시골인데 봄, 가을이면 시냇가 고수부지에 천막을 둘러치고 조금 지난 영화를 상영하는 가설극장이 들어오곤 했지요. 난생처음 영화구경을 가는 게 낯설었지만 가슴 두근거리는 신바람 나는 일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을 그린 ‘피어린 구월산’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지요. 그러다 아버지가 어깨를 들먹이며 우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지요. 돌아오면서 "아버지 영화가 슬프셨어요?"라고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아버지는6,25 한국전쟁 참전용사였지요. 아버지는 자식들과 술자리를 함께 할 때면 무성영화 시대에 관객들 앞에서 영화흐름을 설명을 해 주던 변사(辯士)처럼 6·25 전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그 중에도 구월산 전투 때, 전우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통신병 임무완수를 위해 목숨 걸고 산을 오르내렸다는 대목은 압권이었지요. 그런데 구월산 전투를 그려낸 영화를 보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울먹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아버지 무용담(武勇談)은 끝없이 이어졌는데 늘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이었지요.
 
매년 6월 25일이 되면 아버지는 물만 들이켰습니다. 전쟁 때 전사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곤 두문불출 집에서 제대할 때 후배들이 덕담을 써서 엮어준 추억록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습니다.
저도 가끔 읽어보았는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전우들의 묵직한 이야기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젊은 시절부터 의용소방대원이었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끄곤 했습니다. 몸조심하라는 사람들에겐 ‘6·25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큰 소릴 치곤 하셨지요.
사람들을 좋아하고 술을 즐겨 만나는 아버지는 가끔 돼지고기를 들고 신작로에서 노래를 부르며 오셨습니다. 멀리서 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들리면 뛰어가서 고기를 받아들고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지요. 그때 들었던 노래가 ‘황포돛배’였습니다. 자주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귀에 익어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었지요.
초등학생 시절,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담임선생님에게 ‘유행가를 부른다.’고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말년에 아버지 애창곡은 ‘내 마음 별과 같이’였지요. 서른 초반이었던 저도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 아버지와 함께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 부르려 해도 아버지만큼 잘 부를 수 없다는 걸 절감했지요.
 
치열한 질곡의 삶이 녹아든 인생연륜을 우려낸 듯 깊고 진한 소리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 한숨 반, 눈물 반인 노래는 전쟁보다 더 힘든 역경이 녹아든 경이로운 절창(絶唱)이었지요. 노래는 기쁠 때만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세상이 내 맘대로 살아지지 않아 숨이 막힐 때,
가슴 속 응어리진 한(恨)을 토해내고 싶을 때, 절규하듯 쏟아내는 삶의 일부였던 셈이지요. 그 노래가 찌든 삶의 더께를 조금이나마 씻어주는 생명수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 술자리에선 몇 순배 술잔이 돌아가면 서로 앞 다투어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노래가 시작되면 지나던 사람이 박수를 보낼 때도 있었는데 그 길손을 불러 술을 권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참 멋져보였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회갑 다음해, 삶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하늘로 떠나셨지요. 사람들은 벼슬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건 적었지만 정말 잘 사신 분이라고 추모했습니다.
선산에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올 때 ‘내 마음 별과 같이’ 노래가 귓전을 맴돌았지요. 지금 아버지는 ‘저 하늘 별’이 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사랑합니다.’ 말 한마디 못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노래하던 순간은 행복했지요. 지금도 가끔 별을 보며 아버지의 노래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