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파주에 갑니다. 파주에서 2년간 살았는데 그때 인연을 맺은 몇 사람이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지요.
함께 일했던 전직 공무원과 지역신문 대표,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 몇이 모임을 가집니다.
돌아가면서 점심을 주관해 함께 먹고 카페로 옮겨 차담(茶談)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신변잡담을 나누는 것이지요.
한 여름 햇살이 따가운 날, 연천의 산속엘 찾아들었습니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산자락에 자리 잡고 오리장작구이를 하는 식당이었지요.
"이런 산골에 식당이 있다니?" 의구심도 잠시 나뭇가지를 휘청거리게 하는 사람들의 두런대는 소리가 새소리보다 요란한 나름 알려진 식당이었습니다.
"늙지 말고 익어가자!"
어라? 이런 산 속 식당 건물에 이런 글귀가! 식당 건물에 쓰여 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지요.
노랫말로 듣기는 했지만 낯선 곳에서 만나니 반가웠고 정말 잘 익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다보니 공짜전철을 타는 나이가 되었지요. 이정도 살았으면 오랜 세월이 우려낸 깊은 향기와 넉넉한 사람냄새가 나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허송세월을 보내는 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지요. 한가위가 지나고 절정을 향해 가는 가을처럼 무르익어가야겠지요.
남은 생이라도 깊은 생각과 낮은 몸짓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리 된다고 단정할 순 없는 일입니다.
점심식사 후, 숭의전 인근 카페에 들었는데 크고 넓은 책꽂이에 수많은 책이 진열되어 있었지요.
차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북카페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파주 출판단지 ‘지혜의 숲’ 말고는 그렇게 많은 책이 진열된 곳은 처음 보았습니다.
서점처럼 분야별로 나뉘어 진열되지 않아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천천히 느긋하게 돌아보았지요.
정리되지 않은 다양한 장르의 책들 속에서 보물찾기처럼 두리번거리다 두보(杜甫)와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시성(詩聖) 이백(李太白)의 책 '시선집(詩選集)'을 만났습니다.
자리에 돌아와 차를 마시며 신선의 노래 같은 시를 읽다보니 한 구절이 가슴을 열고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연못에 가득한 꽃들 따뜻한 봄볕에 빛나고 / 창 앞 대나무는 밤에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 옛날과 오늘이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니 / 길게 노래하며 옛 놀던 일 생각하노라!’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살다보면 나이가 들고 늙어 가는 게 당연한 세상 이치이지요. 나이 먹은 게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나이 많다고 내가 옳고 내 고집만 앞세우면 그저 나이 먹은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되지요. 살면서 쌓은 인생경륜을 아랫사람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게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고 어른대접 받는 길이지요. 어려운 이웃을 돕고 봉사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게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길입니다.
늙은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어르신으로 자리매김하는 게 참 인생이지요.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인생의 가을이 아직도 철들지 못하고 설익었다는 아쉬움 속에 깊어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지나면서 이제라도 농익은 과일처럼 익어 가면 좋겠지요. 익지 않은 과일은 먹을 수 없듯이 사람도 덜 익으면 제 구실을 못합니다.
마을 어귀 큰 고목은 하루아침에 자라난 게 아니지요. 백년의 세월, 비바람 눈보라치고 무더위와 혹한을 견뎌낸 소중한 결정체입니다.
인생의 경험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이고 단순한 이론이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참 인생의 보물이지요.
"젊은이는 앞만 보고 빨리 달리지만 경험이 많은 어른은 지름길을 알고 간다"는 말을 곱씹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