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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홍승표 2006. 12. 19. 13:54
 

                눈 오는 날

                         홍 승 표(시인)

 눈(雪)이다. 창밖 기척소리에 닫힌 문을 열고 보니 눈이 오고 있다. 텅 빈 가슴에 눈이 쌓이고 있다. 포근하다. 차가웠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세상을 덮고 또 덮는 것은 눈이 아니고 마음인가. 눈이 맑아진다. 세상이 온통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맑아진다. 온갖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길을 나서고 싶다.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길엔 수많은 기억들이 저마다 들고 일어나 반길 것이다. 보다 새로운 꿈과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마음은 그런 것이리라.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버거울지라도 눈을 바라보면 언젠가는 눈처럼 깨끗하고 거짓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일상의 벽에 부딪쳐 이러한 꿈이 모두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어떠한가. 눈처럼 하얀 마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는 사실자체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눈 오는 날은 마음이 그러하다. 따뜻하고 넉넉하다. 아늑하고 겸손하다. 밝고 상큼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산다는 사실이나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  굳이 따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날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한 일이라는 마음이 드는 날이다. 눈 오는 날은 그자체로 축복인 것이다. 문득 유년시절의 고향이 떠오른다. 유난히도 조용한 겨울밤이 있었다. 그런 밤엔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아니 눈 내리는 날은 세상이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짖어대던 강아지도 잠들고 휘몰아치던 바람소리도 동네 어귀를 지켜선 고목나무가지에 앉아 잠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멀수록 더욱 아름다운 세상. 문을 열고 너무도 조용한 산과 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강아지는 그렇다 치고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끔씩 소리 내던 소도 외양간에서 먹이를 되씹으며 커다란 눈망울만 굴릴 뿐 아무 기척이 없었다. 이러다가 세상이 하얗게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뜬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눈 속에 파묻혀  하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 좋은 꿈을 꾸곤 했다. 이런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두런대는 소리에 잠을 깨어난 후에도 간밤에 내린 눈을 쓸어내지 못하고  먼 하늘만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세상이 시끄럽다고들 난리다. 뭐 한 가지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면서 세상이 온통 들 끓고 있다. 더구나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쳐 오르니 서민들의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반목 속에 죽창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시위와 투쟁이 한도 끝도 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지자 생존권차원에서 예전에 보기 어려웠던 대립과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행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울 때 일수록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며 살아가는 여유가 필요하다.

눈 오는 날이 바로 이런 여유가 되살아나는 날이다. 잠시 버거운 삶의 굴레를 벗고 꿈의 나래를 펴기에 좋은 날이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도 좋다. 꿈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눈 오는 날에는 눈이 되어 날아보자. 날다가 지치면 나뭇가지에 앉아 쉬었다가 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보자. 아름다운 세상은 마음속에 있다. 눈 오는 날에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보자. 그 곳에 오래도록 하얀 눈이 내리고  또 내려 쌓일 것이다. 꿈이 되살아 날 것이다. 새록새록 아름다운 꿈들이 눈처럼 가득가득 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