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칠순 잔치
홍 승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갈 때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운명이라고 한다. 사람의 힘으로 거역할 수 없는 큰 힘 그것이 바로 운명이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내가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바로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60년대 농촌의 대부분 가정이 그러했듯이 우리 집도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의 집안이었다. 더구나 적은 농토에 6남매를 둔 부모님께는 여덟 식구 입에 풀칠하는 일조차도 더 없이 버거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부모님은 많지 않은 땅을 일구고 가꾸는 농사일 틈틈이 날품팔이를 하면서 근근이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6남매가 학교엘 다니기 시작하자 우리 집 여덟 식구가 살아가는 일은 차라리 전쟁에 가까웠다. 그 당시 우리 동네의 다른 집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는 꿈도 못 꾸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만은 다른 집보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자식공부 시키는 일에는 미련할 정도로 억척 스럽게 집념을 보이시는 것이 차라리 고맙고 정말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집스러움에도 한계가 있었다. 급기야 학비 마련을 위해 해거리로 많지 않은 논밭을 팔아야 하는 눈물겨운 일이 늘어만 갔다. 그런 와중에도 부모님은 하는 맏이가 잘 돼야 한다며 형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나보내는 결단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졸지에 장남 역할을 맡게 된 나는 학교가 끝나면 땔나무를 하고 소꼴도 베고 농사일도 거들며 부모님을 도우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고교 졸업 후 공무원을 하던 형이 군대에 입대해 복무하고 있었고 밑으로 두 명의 여동생과 또 두 명의 남동생이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는 집안일을 돕는 것이 차라리 순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친구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메어지고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싶다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버님을 수없이 만나 끈질긴 권유와 설득을 했고 수십일 뒤늦게 꿈도 못 꾸던 고등학교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고등학교에 보내준 부모님이 너무 고마워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힘을 다해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다. 이러한 열정으로 연세대학에서 주최한 전국 남ㆍ여 고교생 문예콩클 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고3 여름방학 때는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당당히 합격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은 더없이 지루하고 힘겨웠다. 사실 고등학교를 다닌 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지만 연세대학 주최 문예콩클 장원으로 국어국문학과에 한해 입학등록금을 면제해 주는 특기장학생으로의 입학 특전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부모님도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겠지만 형편이 형편인지라 짐짓 모른 체 하시는듯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 부모님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을 다니겠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밖으로 나가셨고 어머니께서는 「잘 생각했구나, 정말 고맙다」며 두 손을 꼭 잡고 오랫동안 놓아주질 않으셨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시작한 공직생활이 26년이나 훨씬 넘어 버렸다.
그런데「몸을 생각지 않고 집을 생각지 않고 자신을 생각지 않는다.」는 이른바 三忘의 공직생활에 몰두하다 보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무원이 된 나를 자랑스러워하셨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스러울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지난해 어머님의 칠순잔치를 잔치답게 해드리지 못한 일은 지금도 가슴속에 큰 아쉬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십년 전 예순 둘의 정말 아까운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뒤 혼자되신 어머님의 칠순잔치를 해드리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자 마땅히 해드려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고향마을 면장으로 근무하시던 형님께서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총선을 2주일 정도 앞두고 칠순 잔치를 하는 것은 자칫 선거유세장이 될 수도 있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또한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나는 남의 잔치 얻어먹고만 다니는 사람이냐」며 볼멘소리를 하시곤 묵묵히 계셨지만 섭섭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결국 형님과 나의 의견대로 가족끼리 식사나 하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졌다. 그것도 면소재지에서 20 여리 떨어진 음식점을 빌려 학교 다니는 손자ㆍ손녀들도 참석시키지 않은 채 정말 조용하게 칠순 잔치상을 차려 드렸다. 두 명의 공무원 자식을 둔 죄(?)로 칠순잔치는 그렇게 조촐히 끝이 났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아쉬움도 없는 듯했다.
그런데 지난 봄 형님의 장인 되시는 사돈어른 칠순잔치에서 뵌 어머님의 표정은 그것이 아닌 듯했다. 어머님의 얼굴에선 지난해 칠순잔치를 하지 못한 아쉬움과 섭섭함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아버님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져 왔다. 이런 와중에 형님의 손에 이끌려 무대로 나가게 된 나는 아버님께서 살아생전에 즐겨 부르시던「내 마음 별과 같이」를 있는 힘을 다해 목 놓아 불렀다. 그리곤 어머님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머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하늘이 희뿌옇게 보이기 시작 했다. 평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불효를 했지만 공무원이라는 핑계로 어머님의 칠순잔치를 못해드린 불효자식이 지금도 서울에 있는 도청의 한 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가끔 출퇴근길 전철을 갈아타야 하는 신길 역과 사무실 창밖에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63빌딩 사이로 시골의 풍경이 겹치기도 하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때로 서울지역 경조사에 얼굴마담으로 대리 참석할 때면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곤 한다. 그래도 이처럼 묵묵히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님이나 살아계신 어머님께서 항상 보살펴 주시는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정말 존경스럽고 고마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오늘도 넋 나간 시간들이 하루해를 붙잡고 노을이 손을 흔들며 떠나가고 있다. 길 잃은 한줄기 바람이 소용돌이를 치는 한켠에서 갈 길도 돌아설 길도 없는 내 모습만이 초라한 그림자로 앉아 있다. 불현듯 이번 주말에는 불쑥 시골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흐릿한 어둠속에서 별 한 무리가 가슴 가득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