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내려와서
며칠 전 어머니를 하늘나라에서 홀로 지내시던 아버지 곁에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어느 호텔방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TGV를 타고 밤늦게 도착해 잠 든지 2시간 정도가 지난 새벽에 비보를 접하고는 머릿속이 갑자기 텅빈듯 아무생각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국땅이라 마땅히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10여 시간은 평생을 두고 가장 지루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온몸이 떨리고 사지가 뒤틀리고 기내식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물만 들이켰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거의 그러했지만 필자의 어머니는 평생을 고생만하시다가 돌아가신 정말 불쌍한 분이라는 생각이 절절하기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시골로 시집와그리 많지 않은 땅을 일구면서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는 일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땅을 일구고 날품팔이까지 하시면서 저희 6남매를 고등학교이상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물론 많지도 않은 땅을 팔아가면서까지 억척스럽게 공부를 시키신 부모님은 마을사람들에게서 제 정신이 아니라는 손 까락 질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미련스러우리만치 우리를 가르치시느라고 허리띠를 동여매시며 버거운 삶을 지탱해 가셨습니다.
코흘리개였던 필자는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마워 학교수업이 끝나면 책가방을 마루에 내던지고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하루해를 보내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곤 했지만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일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도무지 꾀를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가 일찌감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3 여름방학 때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뒤 군에서 제대한 형과 공무원생활을 시작하면서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학진학의 꿈은 셋째, 넷째 남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질 무렵인 14년 전에 아버지께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팔자가 피려고 하니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정말 지지리도 복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홀로 되신 어머니는 망연자실 그동안 많은 질곡의 세월을 눈물로 보내셨습니다. 말년에는 당뇨에 시달리면서 약간의 치매증세 마저 보이시곤 했습니다. 석달 전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 할 때 만 해도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황망함속에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모시고 돌아서는 뒷전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참으로 어렵게 살아오시고 남긴 물질적 유산이라고는 집 한 채와 논 몇 마지기뿐이지만 정신적인 유산은 더없이 소중하기만 합니다.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동네사람들과 더없이 사이좋게 지내셨고 어머니와도 특별히 다투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많이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오직 아버지와 자식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신 참으로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마음은 더없는 부자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그 당시 우리 시골동네의 다른 부모님들처럼 고생을 덜하시려고 우리6남매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필자도 평범한 농사꾼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구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우리들과 이웃을 위해 보여주신 두분 어르신의 헌신적인 삶의 자취는 죽을 때까지 큰 교훈으로 마음속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14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저승에서, 홀로되신 어머니는 이승에서 외롭게 지내오셨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사 모두 잊고 그동안 못다 한 사연들을 엮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지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는 이승과 달리 걱정이나 근심 같은 건 없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젯밤엔 보름달이 유난히도 밝고 그 빛이 더없이 그윽하기만 했습니다. 그 달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어머니의 얼굴이 함께 보여 아린 마음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섰습니다. 정말 복도 없이 고생만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나마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무 걱정 없이 하늘나라에서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은 훗날 필자도 부모님과 함께 고생 없이 지낼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그저 간절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