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딸에 대한 기억
홍 승 표
가을이 저물어가는 길목에 중국 남부지방에 있는 난닝 (南寧)시에 다녀왔습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생각이 깊어진다고 합니다만 중국에서의 기억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난닝시는 과천과 자매경연도시로 요하네스버그의 골목길이라는 거리공연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한마당축제에 부시장이 공연단과 함께 왔었지요. 이번 방문은 이에 대한 답방으로 무현문화재 58호인 줄타기 공연단과 함께 난닝시의 민가제(民歌祭)에 참가한 것입니다.
물론 줄타기 기능보유자인 김대균 선생이 이끄는 줄타기공연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흥겨운 가락과 추임새 그리고 가슴을 졸이고 손에 땀이 흥건히 고이게 하는 줄타기공연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습니다. 난닝시 부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매년 정기공연을 요청해온 사실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방문단 모두 보람과 긍지를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민가제 공연만 해도 그렇습니다. 운동장 절반만한 공연무대크기에도 놀랐지만 출연진만 4천여명에 달하는 대규모공연단이 우리를 압도했습니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돌아가는 무대에 오르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습니다. 9층 높이의 조명탑에서 벌어지는 폭죽이며 불꽃놀이는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2시간이 넘는 동안 수백 수천의 출연진이 끊임없이 매끄러운 공연을 펼치는 것을 보며 이들의 공연수준이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갖추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지방의 공연을 중국의 국영방송인 CC-TV에서 생중계를 하는 것도 특이 했습니다. 그만큼 민가제공연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또 한번 필자를 놀라게 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바로 계림 양삭에서 본 인상 유삼저 (印像 劉三姐)라는 저녁 공연이 바로 그것입니다. 붉은 수수밭이나 연인, 영웅 등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장이모우(張藝謨)감독이 연출한 이 공연은 한마디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필자 역시 이들 영화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던 터라 적지 않은 관심과 함께 작은 흥분마저 느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인상 유삼저는 유씨네 셋째 딸에 대한 기억이라는 뜻이고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조영남이 부른 최진사댁 셋째 딸이라는 노래가 있었지요. 셋째 딸은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듯이 계림 양삭의 유씨네 셋째 딸도 절색이었다고 합니다. 그 셋째 딸을 동네 부자가 눈독을 들이면서 추파를 던지며 갖은 술책을 쓰지만 그 엄청난 유혹을 뿌리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내용이지요. 張감독이 5년간 기획하고 연출해서 지난 2004년부터 막을 올렸다는 이 공연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광명품이라고 합니다. 강을 막아 넓은 담수호를 만들어놓고 무대를 설치한 것이 처음에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고 칠 흙 같은 어둠을 뚫고 한 자락 조명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을 비추면서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3천여 관객들은 숨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을 무대로 이렇게 아름다운 무대 연출과 공연이 가능한 것이로구나 하는 감동이 물결쳐 왔습니다. 어둠을 빚어 빛으로 떠 올리고 빛에 빛을 더하여 어둠으로 승화시키는 조명 연출은 참으로 매혹적이고 고혹했습니다. 특히 호수에 뜬 초승달위에서 춤추는 유씨네 셋째 딸의 춤사위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천상의 몸짓 그 자체였습니다. 때로 화려하게 솟구치고 때로 낮은 색으로 엎드리고 때로 조용히 물결치는 조명아래 펼쳐지는 공연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야외공연예술의 극치이자 백미였습니다.
8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한 6백여명의 출연진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현란한 몸짓으로 관객모두를 때로는 꿈의 세계로 때로는 환상의 세계로 때로는 흥분과 환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중국에 몇 차례 다녀본 일이 있는 필자로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대단하고 좋은 것을 보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이모우 감독에게 왜 2008년 북경 올림픽의 개막공연 연출을 맡기는 등 중국 사람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는가하는 것을 일순간에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지금 서울대공원이나 애버랜드 저수지 또는 안성의 고삼저수지 광주 추곡저수지 같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담수호에서 우리도 한번 이 같은 공연이 펼쳐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연출가들이 결코 장예모감독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당축제 때 관악산 계곡의 물가에서 펼쳐진 오이디푸스의 산이라는 공연의 성공이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저물어가는 가을에는 생각도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바람 따라 거니는 낙엽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인상 유삼저와 같은 공연을 한번쯤 깊이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