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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上海)에 가면...*^*

홍승표 2011. 4. 28. 11:31

 

 

상하이(上海)를 가서 제일먼저 찾은 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입니다. 두 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낡고 허름한 곳이더군요. 계단도 좁고 건물의 규모도 작아 비록 일제강점기였다지만 한 나라의 정부가 청사로 사용한 곳이라기엔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청사를 돌아보는 동안 당시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그 자체로 우리의 아픈 역사이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死力을 다한 선열의 숨결에 벅차오르는 감동과 敬畏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요.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의 역사는 파란만장합니다. 이곳에서 7년 동안 임시정부를 꾸려가던 김구 선생 등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虹口公园) 巨事후 일본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지요. 지난 2007년 상하이시가 임시정부 청사 일대의 재개발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임시정부청사의 원형이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지요. 정부는 당시 시진핑 상해 당 서기에게 역사적 유물인 임시정부 청사를 보존해줄 것을 요청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독립운동 당시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백범 김구 선생이 집무하던 장면이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한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진 영웅, 윤봉길 의사의 흉상도 마련되어 있지요.

 

 

망명정부는 일제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무려 27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집요한 추적이 시작되자 정부청사를 옮겨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이지요. 이렇게 오랜 기간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들고 치열했었다는 傍證이겠지요. 일제 치하에서 기금을 모으기도 어려웠고 대다수 국민들은 그런 임시정부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애국 열사들은 대한민국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목숨을 바쳐 일한 것이지요.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한국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청사를 둘러보는 동안에도 제법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지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도하고 한편으론 마음이 든든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독립운동을 한 유적지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녔기에 모두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겁니다. 모금함에 약간의 정성을 표했더니 열쇠고리와 볼펜이 담긴 기념품을 건네주더군요. 작지만 마음속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흐뭇했습니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이곳이 재개발 예정지역이라 언제 헐릴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정말 안 되겠지요.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헐릴 처지에 놓였었지만 우리 국민과 정부의 노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다행한 일입니다. 비록 독립 운동가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초라한 임시정부 청사와 유물만 남았지만 우리는 그때의 역사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적어도 임시정부 청사 유적만큼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일 겁니다. 이곳이 헐리면 우리 선열들의 독립정신도 훼손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서 남긴 글이라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루쉰공원(鲁迅公园)에 갔습니다. 그때는 홍커우 공원(虹口公园)이라고 불렸다지요. 당시 상하이의 일본군과 거주민 위주로 홍커우 공원에서 대관식과 천황탄생일 축하회를 겸한 전승 경축연회가 열렸답니다. 일본의 군부 요인이 모였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요시노리 대장은 테러를 우려해 경계를 최고로 강화했다지요.

 

 

그런데도 윤봉길 의사는 일본의 치밀한 감시를 뚫고 들어가 폭탄을 던진 것입니다. 이 거사(巨事)로 총사령관 시라카와와 상하이 일본 거주민 대표였던 가와바타 등이 죽었고 많은 일본군 장성들이 중상을 입었다지요.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 거사는 한국인의 항일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계기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 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 인근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해방되기까지 중국 지역을 떠도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루쉰 공원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과 의거 현장 기념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돌아보며 그 얼을 기리고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지요. 백범 김구 선생이나 윤봉길 의사 같은 선구자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상하이를 찾는 한국 사람이라면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신 선열들의 발자취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다른 관광지에선 사진이 남지만 이곳에선 선열들의 나라사랑의 정신과 氣를 가슴에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하이에는 지금도 독립운동에 몸 바치신 우리 선열들의 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