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끝은 늘 싱그럽고 상큼합니다. 천둥번개 벼락소리가 세상을 뒤 흔들던 날 밤 가슴이 쿵쾅쿵쾅 정신이 혼미해졌었지요. 아마도 살아오면서 저도 모르게 죄지은 게 가슴 한 구석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새삼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잘 사는 거 그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오월 첫날에 감악산엘 들었습니다. 산자락은 이미 연초록 물결이 검푸른 빛을 더해가고 있더군요. 푸른 빛 옷으로 갈아입는 나무들이 제법 어우러져 보였습니다. 산허리엔 벚꽃이 만발하고 진달래꽃도 아직 무성하더군요. 어제 내린 빗줄기를 견디고 의연한 얼굴로 화사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이처럼 우리 곁에서 해맑게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산에 드는 일은 언제나 새롭고 행복한 일입니다. 때로 산에 올라 정상을 정복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잠시 山頂에 머문 것이지 정복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산을 찾아 산 정상에 다다른 사람은 그곳을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 정복한 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복한다는 건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산은 절대 무릎 꿇는 일이 없습니다. 산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뿐 그곳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산은 그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산을 오른다는 말보다는 산에 들어간다는 말이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장군봉을 지나면서 꽃이 보이질 않더군요. 그곳엔 이제 꽃망울이 도톰한 입술에 연분홍 립스틱을 바르며 세상에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뭇잎들도 연초록 눈망울을 굴리며 기웃거리고 있더군요. 임꺽정 봉 인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산이지만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비록 꽃이 피고 잎이 나지는 않았지만 나무 아래 양지바른 곳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소담한 얼굴로 웃고 있었습니다. 이름 모를 새들이 그 꽃들과 재잘거리며 놀고 있더군요. 자그마한 자색 꽃을 어루만져 보았습니다. 순간 그 꽃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리더군요. 이방인의 무례한 손길이 징그러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차! 잘못했구나 싶더군요.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발길을 옮겼습니다.
정상에 있는 675m 標識옆에서 인증 샷 한방을 날렸습니다. “ 감악산 정상의 氣를 보냅니다. 늘 싱그럽고 상큼하고 향기로운 행복한 오월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까운 분들에게 띄웠는데 오월 첫날 메시지로는 환상 그 자체였지요. 산촌 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더없이 고즈넉했습니다. 황사 때문인지 가파르고 외딴 길이라서인지 사람들이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숲을 헤치며 나뭇가지사이로 풀꽃향기가 환한 웃음소리를 날리며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신비로운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한없이 微微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세파에 찌들고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이더군요. 자연에 대한 敬畏와 무한한 감동이 물결쳐 왔습니다.
갑자기 새한마리가 靜寂을 깨며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문득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함께 산행에 나선 묘령(?)의 여성 두 분을 낙엽이 쌓인 곳에 앉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노래를 불렀지요.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이 마음도 피어...” 부르고 난후 역시 안 부르는 게 나을 뻔 했다는 아쉬움이 밀려 왔습니다. 술 한 잔 걸쳐도 잘 안 나오는 노래가 목도 트이질 않은 멀쩡한 대낮에 제대로 나온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감악산 나무와 돌과 이름 모를 꽃과 새들과 지나던 구름 한 자락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들었으면 그걸로 된 것이지요.
산에 들어 나무가 되고 돌이 되고 꽃잎이 되고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산에 들면 때로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을 때가 있지요. 그만큼 산에 드는 일은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촌마을이 가까워 올수록 연두색 산자락은 서둘러 푸른 옷으로 갈아입고 있더군요. 계곡의 물소리가 더없이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찌들었던 삶의 더께를 말끔히 씻겨 내리더군요. 지난밤 요란했던 천둥번개소리나 지축을 흔들며 내리던 빗소리는 이미 계곡의 물소리로 변한지 오래인 듯 했습니다. 계곡을 벗어나는 아쉬운 발길을 산자락이 붙잡고 놓아주질 않아 마음만 감악산자락에 벗어던지고 돌아섰지요. 오월의 첫날은 이렇게 행복했습니다. 머지않아 던져두고 온 마음을 찾으러 감악산을 다시 만나야 할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