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승표 (시인) |
조선시대 양반마을이 경주에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안동 하회마을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양동마을은 이름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었지요. 경주에는 그만큼 국보급 문화유산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신라의 유적지에 가려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라지요. 사실 양동마을을 가자고 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내로라하는 유네스코 지정문화유산이 즐비한 경주에 전통마을이 과연 볼만한 가치가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경주 시내에서 20분 남짓 달려 양동마을을 접어들자마자 정말 거짓말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을 원형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고풍스러운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더군요.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듣고보니 양동마을이 더욱 새롭게 보였습니다. 설창山의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더군요. 마을을 거슬러 올랐다가 뒤쪽 언덕에서 내려오니 기와집과 초가들이 나무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였습니다. 잘 정돈된 집과 대문, 돌담과 나무가 잘 다듬어진 민속촌 같더군요. 양동마을은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선 조선시대 청백리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과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고 하지요. 그만큼 명당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주 李氏와 경주 孫氏 가문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더군요.
양동마을에는 無첨堂과 香壇·觀稼亭 등의 보물을 비롯해 24점의 문화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 전체가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마을이지요. 양동마을 곳곳에는 초가를 다시 얹고 한옥을 개보수하고 담장을 새로 쌓는 일손들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쪽지방으로 갈수록 개방적인 구조를 갖는 전통 한옥구조와 달리 양동마을의 집은 모두 폐쇄적이지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영남학파의 전통을 잇고 있어 집의 구조도 자연스레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방·안방·행랑방·책방 등이 구분지어 연결되고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따로 나 있지요. 이처럼 ㅁ자를 이루고 있는 집은 언뜻 보면 막혀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구석구석 뚫려 있어 외부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손님이 많은 집은 부엌의 천장을 뚫어 요리를 만들 때 생기는 열기를 빼냈다고 하더군요. '노천부엌'인 셈입니다. 우리 조상의 삶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지요. 자연채광을 염두에 두어 작은 마당을 집 구석구석 만든 것도 이채롭습니다. 하늘을 담고 있는 '햇빛우물'이 폐쇄적인 가옥에 빛을 퍼 올리고 있지요. 양동마을은 이미 유명한 영화 촬영지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영화 '취화선', '내 마음의 풍금', '혈의 누', '스캔들'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지요.
마을에는 500년이 넘은 古宅과 觀稼亭·심수정 등 많은 정자가 있습니다. 조상을 추모하고 자손의 講學을 위해 지은 정자는 숲 속에서 날아드는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져 멋과 풍류를 느끼게 하지요. 150여호의 古가옥과 초가가 골짜기와 능선을 따라 500년의 전통과 향기를 뽐내고 있습니다. 돌담길을 따라 가면 담장 너머로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조선시대 양반 고을로 마실 떠나는 선비라는 착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양동마을의 전통과 문화는 오늘날에도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을 앞에는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사람들을 반기고 있지요. 통일신라가 아닌 조선시대의 경주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 시대를 초월해 세대를 이어가는 양동마을을 찾아본 것은 참으로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아쉬움을 접고 돌아오는 뒷전으로 글 읽는 소리와 은은한 연꽃향기가 더없이 싱그럽고 상큼했습니다. 양동마을이 오래도록 잘 보전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