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부부 십계명

홍승표 2011. 11. 9. 09:14

 

나이를 먹고 늙으면 힘이 빠지고 기력이 쇠퇴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젊어서 황소고집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던 가장도 오십 줄을 넘어가면 아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지요.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이른바 삼식이가 되면 졸지에 구박덩어리로 급 전락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나이 먹기 전에 잘해”라는 말이 성행하는 것이지요.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아무리 잘나고 강한척해도 家事 일은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게 현실이지요. 늙어서 집에 죽치고 지내며 세끼를 얻어먹으려면 죽어 지내야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엔 두 부류의 남자가 있다고 하지요. 아내를 완전 무시하거나 완전 떠받들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지난 추석 명절에 일흔 되신 할아버지가 떡을 먹다가 목구멍에 걸리는 일을 당했다지요. 순간적으로 氣道가 막히는 황당한 일이 생긴 겁니다. 황급히 119 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지요. 그런데 의사가 할아버지의 코에 손을 대 보고 診脈을 보더니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일순간 함께 갔던 가족 친지들이 울음바다를 이뤘다지요. 명절에 큰일을 당했으니 난리가 난겁니다. 가족들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면서 통곡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눈을 뜨는 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막혔던 떡이 넘어간 것입니다. 모두들 우느냐고 정신이 없어 본 사람이 없는데 할머니만 보았다지요. 그때 할머니가 조용히 눈을 쓸어 감기며 귓속말을 하더니 정말 돌아가셨답니다. 할머니가 “그냥 눈 감고 의사 말 들어”그랬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할아버지 이야깁니다. 이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 난 한량이었다지요. 일도 안하고 놀면서 거의 매일 술에 젖어 살았다고 합니다. 가사 일은 물론 농사일마저도 할머니가 도맡아 했다는 것이지요. 할머니 눈엔 남편이 아니라 정말 원수 같았을 겁니다. 오죽하면 “저 원수 언제나 죽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지요. 그런 와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더란 겁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할머니는 자식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손뼉까지 쳐가며 잘됐다고 좋아했다지요. 보다 못한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덤을 파고 나와 해코지할거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깔깔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지요. “내 그럴 줄 알고 관을 거꾸로 묻었지. 기를 쓰고 파면 아프리카쯤 나올걸...”

 

엊그제 선배 공무원을 모시고 점심을 함께 한 일이 있습니다. 일흔 가까운 나이임에도 건강하시더군요. 그 분이 현직에 계실 때는 내로라하는 대표적인 술꾼으로 정평 나 있었습니다. 더구나 성질이 불같이 급하고 무서워 범접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지요. 출입기자도 두드려 팰 정도로 불같은 분이었습니다. 집에서도 폭군이었다지요. 그런데 요즘엔 집에서 아내 눈치를 보며 산다는 겁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인생의 경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이지요. 그러나 역시 이빨 빠지고 발톱 빠진 호랑이처럼 무기력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화가 난 표정일 때는 즉시 눈을 내려 깔고 아내 눈치를 살피게 되지요. 나이든 남자들이 겪어야 하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옥신각신 시비를 가리지 않고 아량 있고 너그럽게 양보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적어도 자신을 낮추고 가진 걸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려놓는다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말로 내려놓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입으로만 내려놓았다고 하는 사람은 내려놓는다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부부간에는 내려놓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부부간에 져주면서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더군요.

 

아직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일 겁니다. 부부십계명이라는 게 있지요. 두 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않고 불이 나기 전에는 고함을 안 지르며 하루 한 번 이상 칭찬하고 격려하라는 겁니다. 다른 부부와 비교하지 않고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으며 분노를 품고 잠자리에 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처음 사랑했을 때를 잊지 말고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며 상대를 고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가지라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지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부부간에 상처를 주면 그 일은 무덤까지 가는 것이지요. 의사 말을 들으라는 아내 말을 듣고 죽는 것도 문제지만 관을 거꾸로 묻을 만큼 원수처럼 사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 한번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話頭를 던져보는 것도 저물어가는 가을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