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선생유적지에서
“숲 속 亭子엔 가을 이미 깊은데 詩人의 회포를 달랠 길 없도다. 저 멀리 강물은 하늘 맞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타는 듯 붉도다. 먼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江은 萬里의 바람을 머금었네. 아아, 邊方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그치네.“
율곡선생이 8살 때 지은 詩입니다. 神童이었던 것이지요. 선생은 선조 때 벼슬길에 들어 동인과 서인의 대립과 갈등의 매듭을 풀어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개혁안도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파주 율곡 마을로 낙향하지요. 그리고 임진강가에 있는 정자에서 학문에 몰두하게 됩니다. 바로 花石亭입니다. 일찍이 선생은 10만 군사 양병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기름걸레로 정자를 닦도록 했답니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封書를 남겼다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御駕가 蒙塵 차 임진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궂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답니다. 왜군이 뒤를 쫓고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지요. 이 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 정에 불을 지르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불을 붙이자 인근이 대낮 같이 밝아져 무사히 강을 건너 피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낙향한 그는 고향 땅 파주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학문에도 몰두하다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율곡선생이 세상을 뜨자 임금님과 만조백관(滿朝百官)이 喪服을 입고 두 달 동안 國葬에 준해 장례를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哭소리가 대궐 밖까지 울려 퍼졌다지요. 그만큼 국민적 존경을 받았다는 傍證인 셈입니다. 장례를 치루는 날 하늘 가득 자줏빛 구름이 뒤덮었다지요. 이곳이 자운서원(紫雲書院)으로 불리게 된 연유입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잠든 紫雲山 선영에 안장된 선생은 문묘에 종향되고 훗날 문성공이라는 諡號가 내려집니다, 지금은 자운서원 외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어 있지요.
자운서원 묘역 여현문(如見門)을 들어서면 돌계단이 나타납니다. 옛날엔 산길이었겠지요. 선생도 이 길을 오르내리며 많은 생각을 다듬었을 겁니다. 이곳엔 오래된 소나무들이 지난날을 회고하며 검붉은 옷을 입고 묘역을 지키고 있지요. 내려다보이는 전경이 그야말로 절경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묘소는 작고 볼품이 없습니다. 國葬에 준하는 장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지요. 묘는 先代로부터 낮은 곳으로 내려 쓰는 게 상례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묘는 어머니 신사임당 묘보다 위에 있는 逆葬 墓입니다. 역장 묘가 된 것은 선생이 살아생전 정했다고도 하고 임금께서 지극히 아끼던 선생을 위해 유명한 地官을 통해 묘 자리를 정했다는 설도 있답니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3년간 侍墓살이를 했고 죽음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금강산에 있는 절을 찾아 불교를 공부하기도 한 효성으로 미루어 임금께서 정하신 것이 맞을듯합니다.
선생의 업적과 그 훌륭함은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삶을 사신 분이라 더욱 존경을 받는 듯합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그때보다 더욱 유명해지고 세계가 그분의 학문을 따른 정치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훗날 정조대왕은 “주자학과 유학을 어우르는 성리학을 완성하셔서 만백성에게 베푸셨으니 참으로 훌륭하시고 남기신 모든 글과 사상과 업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라고 추앙했다지요. 선생이 주장한 10만양병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너무도 참담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국방은 철저히 준비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3공 시절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났다지요.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지더랍니다. “율곡선생 묘소가 남측에 있습니까?” 일순 당황했던 그가 엉겁결에 답했다지요. “ 네! 그렇습니다.” 돌아온 그가 이 사실을 대통령께 보고 드렸다지요. 그 후 대통령의 지시로 율곡선생 묘역이 성역화된 것입니다. 다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화석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자운서원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格이 안 맞는다는 말입니다. 강릉 오죽헌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지요. 북한도 율곡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을 국가보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강릉 오죽헌은 6살 때까지 지낸 곳이고 자운서원은 선생이 학문적 토대를 쌓고 후학을 양성한 뜻을 기리는 곳이지요. 선생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墓도 있습니다. 오죽헌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운서원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시켜야하는 명분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