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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초*^*

홍승표 2012. 9. 11. 09:04

 

                                          伐 草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매년 느끼는 감정은 다르게 다가오곤 합니다. 벌초를 한다고 해서 조상님들이 알아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벌초를 하는 것은 추석 성묘를 할 때나 時祭를 지낼 때 마음이 홀가분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님을 잘 모신다는 마음의 위안을 삼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정말 열심히 비지땀을 흘려가며 풀을 깎고 잡초를 뽑고 또 뽑았습니다. 납골장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산소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산소는 亡者의 휴식처이기도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게 있어서도 마음의 쉼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승진을 하거나 자리를 이동했을 때 아버지산소를 찾아 인사올리곤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산소엘 가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와주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그리 많지 않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6남매를 키우시느라 눈물겨운 삶을 사시다가 고생만하시고 예순둘 아까운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정말 불쌍한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전 벌초를 했고 집안 동생이 개를 잡아 함께 먹었는데 정확히 일주일 만에 사고로 돌아가신 겁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었지요. 어느 분께서는 조상 모신 날, 개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라며 노발대발하셨지요. 그 말씀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버지 돌아가신 것이 너무도 이 맺혀 그날이후로 개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있습니다. 땅까지 팔아가며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신 눈물겨운 삶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지요. 여섯의 자식들은 공부를 제법 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것이 자랑거리인데 우리 부모님께는 그것이 걱정거리였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학교에 안보내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하신거지요. 그 당시 우리보다도 훨씬 잘사는 사람들도 몇몇 집을 빼고는 중학교만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자식들 때문에 남보다 더 고생을 하신 셈이지요. 실제로 저는 부모님이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니 땅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을 우연히 들은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울컥하더군요. 그런 부모님이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못하시면서 그야말로 눈물겨운 질곡의 삶을 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마음 놓고 돈 내고 술 한 잔 제대로 사 드시지 못하셨지요. 훗날 저와 형 그리고 둘째 여동생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형편이 나아지자 신작로 삼거리에서 오고가는 공무원들을 붙잡고 술을 사주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군청 공무원치고 우리 아버지 술을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버지는 시골에서는 드물게 자식 셋이 공무원으로 일하니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변변한 양복 한번 제대로 못 사 입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양복을 맞춰 입으신 건 회갑잔치 직후였지요. 제가 모셨던 어느 지사님께서 양복티켓을 회갑선물로 주셔서 서울까지 올라가 양복을 맞춰 입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너무 좋고 귀한 옷이라며 명절에나 입으신 후 장롱에 모셔두곤 했습니다. 결국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지요. 아버지는 정말 지지리 복도 없는 분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목이 잠기고 가슴이 울컥해지곤 합니다.

 

 

어쨌거나 벌초는 단순히 풀을 깎고 잡초를 뽑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힘겨웠던 삶을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세우는 일인 것입니다. 벌초는 벌초이상의 의미가 있고 산소는 산소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순 둘 그 아까운 나이/어찌 눈을 감으셨을까/비석을 어루만지며/손마디는 떨고 있었다./끝내는 북받치는 설움/눈물 왈칵 쏟아졌다// 가진 것 없던 살아생전/넉넉했던 웃음소리/술 한 잔 걸치시면/ 정겨웠던 그 가락들/불현 듯/내 마음 별과 같이/다시 듣고 싶었다.//햇살이 고운 날에/적막한 선산자락/가슴을 쓸어내리며/돌아오는 발길에는/아버지 웃음소리가/끊일 줄을 몰랐다.//(拙 詩, 伐草 全文)

 

동네에서 유명한 술꾼이셨던 아버지는 인정도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시는 보기 드문 시골 멋쟁이셨습니다. 혼자 술 드신 것이 미안해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집으로 들고 오실 때면 이미자의 황포돛대나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라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시곤 했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서는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 돌아설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도 절절히 뵙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살아 계실때나 하늘나라로 가신 지금이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크나 큰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언제나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황포돛대내 마음 별과 같이를 목 놓아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쓸쓸히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흥얼거리며 아버지의 산을 내려 왔습니다. 별다른 피해 없이 태풍이 지나간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아 가을의 정취가 더없이 넉넉하고 풍요롭기만 한 지금, 이번 추석에는 산소를 찾아 아버지의 애창곡을 정성을 다해 불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 갑니다. 자꾸 생각이 많아지고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가 절절히 그리워지는 걸 보면 이제 저도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중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