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
모처럼 좋은 영화 한편을 만났습니다. 바로 광해라는 영화였지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黨爭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왕위를 둘러싼 당쟁, 권력다툼 혼란으로 광해는 정신적으로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난폭해지고 더구나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는 의심이 생겨 사람들을 못 믿게 되지요. 이런 정신적 충격을 탈피하려 수시로 여자들만 탐하는 왕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들의 위협을 견디다 못해 왕 노릇을 대신할 代役을 찾게 되지요. 그는 최고로 믿는 신하 도승지 허균에게 극비리에 이 일을 맡기게 합니다. 허균은 妓房의 취객들 상대로 걸쭉한 만담을 하는 광대 하선을 궁으로 데려와 광해와 같은 왕 역할을 가르치기에 이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광해에게 진짜 죽을 고비가 닥칩니다. 누군가 그를 독살하려 음식에 약을 탄 것이지요. 광해가 치료를 받는 동안 허균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 광대 하선을 왕에 앉히게 됩니다.
저잣거리를 떠돌던 만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되어버린 천민 하선. 허균의 가르침에 따라 말투부터 걸음걸이, 국정을 다스리는 법까지,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들켜서도 안 되는 위험천만한 왕 노릇을 시작하지요. 그러나 하선은 왕과 똑같은 외모는 물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왕 역할을 완벽하게 해냅니다. 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천민이 진정한 왕이 되어가는 과정이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개되지요. 저잣거리에서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권력을 풍자한 만담을 일삼던 하선이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궁 안에서 왕의 대역을 연기하는 모습은 아슬아슬한 재미와 긴장감을 안겨줍니다. 또한 말투와 걸음걸이는 물론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사소한 일상부터 국정 업무에 이르기까지 생전 처음 접하는 왕의 법도를 익혀가는 과정은 하선 특유의 인간미와 소탈함으로 의외의 웃음과 재미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허균이 지시하는 대로 왕의 대역 역할에 충실하던 하선이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왕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지요. 예민하고 난폭했던 광해와는 달리 따뜻함과 인간미가 느껴지는 왕의 모습에 궁궐이 조금씩 술렁이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왕의 대역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하선의 모습에 허균도 당황하기 시작하지요. 비록 銀 20냥에 수락한 15일 간의 왕 노릇이지만 상식과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그 어떤 왕보다 위엄 있고 명분 있는 목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安慰와 王權만을 염려하던 왕 광해와 달리 정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람과 백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이를 행하는 하선의 모습은 묘한 감동과 여운을 전해줍니다. 권력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민의 모습을 빌어 조선이 필요로 했던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진정한 君主를 꿈꾸던 백성에 걸 맞는 왕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선은 왕 노릇을 하면서 궁 내 가장 아랫사람들의 안위까지 두루 살피고 백성 스스로 노비가 되고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지요. 왕위를 지키기보다 민생을 염려하는 조선이 꿈꿔온 왕이 되고자 합니다. 백성을 생각하고 몰지각한 대신들에 굴하지 않고 옳고 그름만을 판단하는 그는 중상모략으로 궁지에 몰린 충신을 구하는 등 반듯한 성정으로 왕의 목소리를 높이지요. 자기를 죽이려던 도 부장을 용서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된 사월을 배려하고 모함으로 역적 누명을 쓴 중전의 오라버니를 살려줍니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 퍼주려고만 하는 신하들에게 “ 좀 적당히 들 하시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꾸짖습니다. “ 난 내나라 내 백성이 백 곱절 천 곱절은 더 소중하오.” 라고 一喝하는 장면은 가히 이 영화의 白眉이자 壓卷입니다. 그런 하선에게 허균과 조 상선, 도 부장은 물론 중전과 사월이 까지 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지요.
가짜 왕 노릇을 하게 된 광대가 진짜 왕보다도 정치를 잘하게 된 겁니다.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백성의 어려움과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배려의 정치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私慾이 없기 때문이지요. 더 가지려는 순간 백성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정치인은 그들이 쥐고 누리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지요.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권력을 잡는 순간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이 아닌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정치인이 훗날 그 자리를 떠나는 이후, 사람 대접 못 받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지금 새로운 통치자를 선택해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광해군 시절 가짜 왕이 통치했던 보름 동안이 가장 선정을 펼친 시기였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요. 그 옛날, 진짜 왕보다 더 왕 노릇을 잘한 광대처럼 모든 것 내려놓고 오직 백성만을 생각하는 그런 통치자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