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아침에 용인의 명산인 구봉산엘 들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마음이 더없이 싱그럽고 상큼했습니다. 알몸으로 누워있는 순백의 눈이 햇살을 받아 어느 보석보다도 영롱한 빛으로 반짝였습니다. 가끔 산짐승의 발자국이 보이고 새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서산대사께서는 " 눈 길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지금 남긴 발자국이 뒤따르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라고 일갈하셨다지요. 후손들을 위해 잘 살아야 된다는 뜻이었겠지요. 눈길을 걸으며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햇살이 채 들지 않은 산에 들어 눈길을 걷는 순간은 더없이 싱그럽고 상큼했습니다. 그리고 나뭇가지마다 해맑게 웃고 있는 눈꽃은 세상 어느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세상은 눈으로 뒤덮여 낮게 엎드려 있었지만 산은 온통 눈꽃을 피운 채 화사한 웃음을 날리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역시 劫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눈이 내린 때문인지 어쩌다 새소리가 들려올 뿐 산은 그야말로 적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가끔씩 날고 들치며 사람을 놀래게 하던 청솔모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산이 정말 산답다는 생각에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마음은 더없이 푸근했습니다. 산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산이 아니고 마치 유원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하지만 산이 산다워지려면 思惟를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산에 드는 일은 그저 단순히 운동이나 휴식을 위한 시간이 아닙니다. 산에 드는 일은 자연 속에서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해보는 소중한 일입니다. 산에 들어 삶의 근량을 저울질해보고 또 다른 삶의 의욕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정말 살맛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꽃을 피운 산은 참으로 아름답고 싱그러운 하얀 바다 그 자체였습니다. 수 없이 산에 들었지만 이날처럼 마음 상쾌하고 가슴이 후련하기는 오래간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귓불이 시리고 바람이 차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온몸이 따뜻해지고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마음의 훈훈함과 思惟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눈꽃은 자연이 가져다준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눈꽃바다 속에서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게 느껴지는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더구나 특정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인을 위한 배려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산을 벗어나는 길에 옹달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바위틈새에서 몇 방울씩 떨어지는 샘물이 고이도록 자그만 웅덩이를 예쁘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듯했습니다. 나무로 된 예쁜 표주박도 준비해 놓았더군요. 세상은 이런 분이 있어 아름답고 살만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물을 마시고나니 그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샘물처럼 솟구치더군요. 그리고 " 나는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 하는 화두가 떠올랐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산을 벗어났습니다.
이제 한해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아쉬움 속에 한해를 접지만 그 아쉬움이 아쉬움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아쉬움 뒤에는 또 다른 새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는 마음은 언제나 다시 새롭고 가슴 벅차기만 합니다. 언젠가 해맞이의 명소라는 정동진엘 가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너무 많아 고생만하고 마음정리도 못한 채 떠밀려온 뒤로는 산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해를 알리는 햇덩이가 떠오르는 순간은 숨이 멎을 것 같아 그저 넋을 잃은 채 바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지요. 새해 새아침에 떠오르는 햇덩이는 새로운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새해 새아침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언제나 한 결 같이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한해를 앞두고 있습니다. 누구나 새해는 보다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은 날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삶의 의욕을 불사르고 있는 것이지요. 꿈과 희망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어둠을 빛으로 빚어내고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마음들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별다른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모두들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일 것 입니다.
온 누리에 눈꽃이 피어난 것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진 사람이나 갖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눈꽃이 꿈과 희망을 떠 올리게 하는 촉매가 되었으면 합니다. 눈꽃이 우리를 찾아온 것처럼 눈꽃 같은 상서로운 일이 가득가득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꿈과 희망 속에 새해는 모두에게 행복이 가득한 눈꽃바다 같은 축복의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늘 한 결 같이 사랑이 넘치는 그런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오늘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오늘이 더없이 소중한 것은 이 순간에도 우리들 가슴마다 꿈과 사랑이 눈꽃처럼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