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 그 버거운 굴레
도청에서 의전 실무책임자로 일할 때였습니다. 행사 때마다 사전준비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완전 긴장 속에서 지내야만 했지요. 흔히들 “의전은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한방에 간다.”고 말합니다. 의전이 잘되면 다행이지만 잘못되면 행사의 본래목적이나 취지가 무색해지기 때문이지요. 매월 한차례 열리는 畿友會 월례회가 있었습니다. 도지사를 포함한 도 의장, 교육감, 법원, 검사장 등 道 단위 기관장과 국회의원, 시장, 군수, 각급 단체장들이 참여하는 조찬 모임이었지요. 총무과장으로 가서 첫 번째 월례회를 갖는 날이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고 사회자가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진땀이 흐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하더니 혼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엔 아예 머릿속이 하얗고 아득한 게 아무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태극기가 놓여있지 않았던 겁니다.
매월 정례적으로 열리는 이 모임은 도청 강당이 좁아 중기센터에서 행사를 갖곤 했었지요. 당연히 태극기를 가지고 가서 단상에 올려 놓아야하는데 그날따라 서로 미루는 바람에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아침은커녕 물만 들이키면서 겨우겨우 행사를 마칠 수 있었지요. 오후에 지사를 뵙고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때 원래 일이 잘못되는 건 누구도 생각 못할 때 일어나는 법이라며 웃으시면서 “신고식 한번 제대로 했다고 생각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요. 지금도 그 생각만하면 손이 오그라듭니다. 어떤 때는 좌석을 지정해 놓지 않았다며 행사장을 떠나버린 기관장도 있었지요. 민간행사인데도 좌석배치가 잘못되었다며 버럭 화를 내며 죄 없는 공무원만 닦달한 사람도 있습니다. 할수록 어렵고 힘 드는 게 의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건 이런 이유때문이지요.
의전의 기본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데 있습니다. 의전의 출발점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조율하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참석인사의 문화나 가치관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2005 경기방문의 해”를 준비할 때 중국 손님을 방바닥에 앉아 먹는 삼계탕 집에 모시고 갔다가 큰 곤혹을 치룬 일이 있었지요. 중국 사람들은 바닥에 앉지 않는다는 걸 그 때 알게 된 겁니다. 그만큼 사전준비가 부족했다는 말이지요. 그 후론 중식은 물론 한정식 집을 선택해도 반드시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의전은 사전준비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준비가 소홀하면 눈에 보이는 하자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격식이나 절차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자칫 행사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지요. 의전 관례나 격식을 품위 있게 갖추되 유연성 있는 의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예민하게 생각하는 게 좌석배치입니다. 물론 의전은 서열을 중시하고 서열에 따라 예우를 해야 하는 게 핵심이지요. 그러나 참석자들 간에 서열을 정하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참석하는 경우 더욱 그러하지요. 기관장과 의원, 대학총장, 군부대장, 언론사대표, 사회단체장, 민간대표에 이르기까지 혼재된 참석자의 서열을 가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서열이 뒤바뀌거나 좌석배치가 잘못됐다며 항의를 하거나 퇴장을 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그럴 때 의전을 준비한 사람은 그야말로 좌불안석 초죽음이 됩니다. 이러한 연유로 의전부서에 가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의전을 잘해 동기생보다 앞서 승진을 한사람도 많습니다. 남들이 다 어렵다고 하는 일을 쉽게 물 흐르듯 이끌어나가는 일 그게 바로 의전의 매력이기도 하지요.
의전은 형식인 동시에 하나의 전략이며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요소입니다. 의전의 성패가 곧 어떠한 일의 성패와 직결되기 때문이지요. 의전의 수준을 통해 그 기관이나 단체의 경쟁력을 저울질해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를 “비디오시대”라고 하지요. 소리보다는 그림이 중요한 “이미지시대”라는 말입니다. 지난날엔 목소리 좋은 성우나 가수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안무를 겸비하고 무대와 화면을 장악하는 연예인이 대세라는 말이지요. 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엔 격식과 겉치레가 중요했다면 요즘은 상대의 마음과 가치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의전이 대세인 세상입니다. 의전을 담당하는 사람은 행사의 숨은 주역이지요. 의전관은 기획력과 순발력, 포용력과 친절한 몸가짐을 갖춰야합니다. 눈에 띄지 않고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행사전반을 꿰차고 一絲不亂하게 진행시켜 나가는 연출가이기 때문입니다.
행사에만 의전이 필요한 건 아니지요. 사람 사이에도 의전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갖출 건 갖춰야 합니다.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다닐 때 몇 명의 친구에게 저녁을 먹자고 부른 적이 있지요. 그중 한 친구가 반바지에 슬리퍼차림으로 다녀갔는데 아들 녀석이 한마디 던지더군요. “아빠! 반바지에 맨발로 온 아저씨 다음에 부르지 말아요.” 어린 녀석이 보기에도 안 좋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저녁식사를 초대받고 식당엘 갔는데 정작 초대한 사람이 한참을 늦게 나타나 당황한 적도 있지요. 그 뒤로 사람을 초청하면 늘 먼저 나가 기다리곤 합니다. 초청한 사람이 먼저 준비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사이는 물론 부부와 부모 자식 간에도 지켜야할 의전이 필요한 법이지요. 상대방을 알고 배려하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의전이고 행복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