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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尙宮) 이야기*^*

홍승표 2013. 1. 28. 16:03

옛날에 상궁이라는 제도가 있었답니다. 상궁은 고려사백관지에 내직(內職)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시작된 제도라고 전해오지요. 조선시대에는 내명부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상궁은 궁관의 가장 높은 지위에서 궁내의 일을 총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명부는 크게 내관과 궁관으로 구분되는데 내관은 정1품의 빈()에서 종4품의 숙원(淑媛)에 이르는 왕의 측실(側室)이었지요. 궁관은 정5품의 상궁에서 종9품으로 그 칭호에 따라 직책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상궁의 신분은 대체로 내관과 구분되었으나 왕과 동침하게 되면 내관으로 승격했다지요.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떠오른 인물이 광해군이지요. 세금을 보유 토지에 따라 부과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중립적 외교를 펼쳐 백성들의 호응을 얻은 임금입니다. 하지만 측근들의 비리가 끊이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하지요. 당시 권력의 핵심에 김개시라는 상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천민 출신의 상궁은 광해군의 즉위를 도운 뒤 15년 동안 무소불위의 힘으로 전횡을 일삼았다지요. 김개시의 전횡이 하늘을 찌르자 왕권이 흔들렸고 무리한 궁궐 공사로 이어져 광해군이 민심을 잃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상궁의 힘이 대단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제가 현대판 상궁(?)을 만난 것은 파주 부시장으로 일할 때였지요. 그때 농업관련 기관장들과 정례적으로 만나는 모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농협 시 지부장으로 일하던 그의 성함이 상궁이었지요. 그것도 남상궁도 아니고 여상궁 이었습니다. 처음엔 당황했지요. 성함도 그렇고 술 실력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남이 지속되면서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지요.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겸손한 언행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혹평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정말 출중하고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궁이 임금님을 모신다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들을 극진히 대한다고 하더군요. 농협을 찾는 사람은 물론 현장에서 만나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기쁜 일은 물론 어려운 일은 성심을 다해 함께 해 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지요. 98년 폭우로 파주일대가 물에 잠겼을 때 보트를 타고 출근해 사무실을 지키고 정리한 일은 지금도 농협사회의 무용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지요.

 

 

농협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쌀 문제라고 합니다. 최근 쌀시장은 WTO체제에 의한 수입량이 매년 늘어나고 소비량은 줄어 모든 부담이 농협과 농민의 몫으로 돌아온다지요. 이를 해결한 것도 여 지부장입니다. 3년 동안에 걸쳐 9개 지역농협과 협의해 농협 쌀 조합 공동사업법인 출범시키고 15개에 이르는 쌀 브랜드를 임진강 쌀로 통일하고 판매를 일원화해 전국 10대 브랜드로 끌어올린 것이지요. 농민 조합원이 원하는 벼 물량은 모두 수매한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파주 농민들은 매년 쌀 수요 감소로 쌀 수매를 걱정했는데 쌀 판매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2008년부터는 일본의 하다노시농협과 교류를 하며 양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있지요. 우호농협 체결 이후 농업 분야의 교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두 농협이 서로 상생발전하고 있는 겁니다.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는 연인원 1,100여명이 인력 지원에 나섰으며 6,600만원 상당의 물품 및 기금을 전달했었지요. 그는 농협 36년간 18년을 파주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농민을 임금님처럼 모시는 그의 철학은 그를 전국최초로 6년간 파주시지부장으로 일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보통 한곳에서 1~2년 정도 일하는 지부장을 6년 동안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지요.

 

 

사람이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임금님처럼 모시며 살아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농협이 농민을 위해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때로 농민위에 군림하는 일도 있었지요. 그분은 자신의 이름처럼 농민을 임금님처럼 끔찍이 모신 분입니다. 그분을 만난 건 행운이었고 많은 걸 배웠습니다. 공직자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한수 배웠다는 말이지요. 농민을 임금님처럼 모신 그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전설로 남겠지요. 이제는 사모님을 임금님처럼 모시며 웃음과 사랑 가득한 행복한 삶을 사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