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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강 나룻길*^*

홍승표 2016. 2. 5. 10:44

세상에 길은 많습니다. 길의 시작은 먼 옛날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가장 먼저 인류역사를 만든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다니던 곳이 바로 길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중생대에 공룡이 살고 구석기 사람들이 지냈던 한반도의 서부 연천이 길의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지요. 지형과 환경의 변화로 구석기인들이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들어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됩니다. 한반도의 모든 길이 연천에서 시작됐다는 방증이지요. 연천에서 시작된 길이 실핏줄처럼 한반도 전역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길의 시작이자 출발점의 자취는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지요. 바로 연천 땅 군남면 선곡리에서 삼곶리에 이르는 연강(漣江) 나룻길입니다. 연(漣) 자는 '물결이 일다'라는 뜻이지요.


연강은 예부터 연천군을 흐르는 임진강을 일컫던 말이고 군남 댐 두루미 공원에서 삼곶리 돌무덤을 지나 태풍전망대에 이르는 길이 연강 나룻길입니다. 16km에 이르는 이 길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지요. 요즘 보기 어려운 두루미, 산양과 멧돼지, 고라니 등은 물론 어느 곳에나 희귀한 꽃나무와 들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낮게 엎드린 산자락과 울창한 숲이 유유히 흐르는 연강과 한 폭의 산수화처럼 어우러져 있지요. 이러한 절경은 조선시대 풍류의 대가인 겸재 정선(鄭敾) 선생이 그림을 그려 넣은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가객(佳客) 정선의 눈에도 연강 주변 산자락과 너른 들판, 시나브로 피어나는 꽃과 새싹들이 신비로웠을 것입니다.

물길은 흐름에 따라 시내나 폭포, 샛강이나 큰 강, 여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요. 강은 하구로 내려올수록 강폭이 넓어져 물 흐름이 느려지게 마련입니다. 연천을 흐르는 강은 폭이 좁아 물 흐름이 빠른데 한탄강을 만나면서 물이 많아지고 물흐름도 여유로워지지요. 땅속으로 스며든 강물은 곳곳에서 작은 물길로 솟아올라 연천(漣川)이라는 지명을 낳게 됩니다. 유려한 강을 따라 물 좋고 비옥한 땅은 구석기 사람들에겐 더없이 좋은 삶의 터전이었지요. 완만한 산자락이나 유유한 언덕은 주거지를 마련하고 곡식을 키우는 천혜의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연강 여울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인류를 품게 된 연유이지요. 연천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구석기 축제가 열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발자취가 살아있는 작은 언덕이나 평야는 모두 율무밭으로 바뀌었지요. 우리나라 율무 생산량의 60% 이상이 연천에서 생산되고 있는 연유입니다. 봄이 되면 이 길은 끝없이 펼쳐진 율무밭에서 뿜어져 나오는 초록빛 내음이 온 누리에 가득하지요. 율무 꽃이 하얗게 피는 삼복더위를 지나 가을이 되면 율무를 수확하는 사람들의 군무는 그 자체로 색동옷을 입은 산자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됩니다. 율무를 수확할 무렵 연강자락 적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지요. 나룻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는 어부의 콧노래가 적벽에 닿기도 전에 노을이 짙어지는 시공(時空)의 경지를 맛보게 됩니다. 절제된 삶속에서도 여유와 풍류를 삶의 가치로 삼았던 옛날 선비들이 연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50만 년 전 인간이 처음 살고 길을 낸 이래로 인류역사가 이어져 온 연강 나룻길이 원래 그대로 복원된 것은 꿈같은 일입니다. 더구나 6·25 한국 전쟁 이후 60년 이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길은 말 그대로 천혜의 자연보고(寶庫)지요. 비록 태풍전망대에서 길이 끊어졌지만 북한 땅을 바라보며 통일의 꿈을 키우는 것도 연강 나룻길이 주는 또 다른 매력입니다. 세상에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연강 나룻길은 인류가 살기 시작한 첫 보금자리였고 우리나라 모든 길의 시작이고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요. 뿌리를 찾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늘빛 고운 날 연강 나룻길을 만나보세요. 아득한 옛날 우리나라에 첫 둥지를 틀었던 옛 조상들의 삶의 향기가 새록새록 안겨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