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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배려하며 사셨던 아버지!

홍승표 2019. 11. 13. 11:05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다른 집 송아지를 키워 내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지요. 1년 동안 키워 팔 때 송아지 값을 제외하고 이익금의 절반을 나누기로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셨지요. 어렸지만 빈농에 6남매를 키우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농사는 농사대로 지으면서 돈이 될 만한 일은 무엇이든 하든 억척스러운 분이었지요. 맏이가 잘되어야 한다며 형을 서울의 고등학교에 어렵사리 유학 보냈는데, 세 살 터울인 나까지 중학교에 보내려니 부담이 크셨을 것입니다.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는 4명의 동생이 있는 차남의 위치는 형제애와는 상관없이 부담스러운 것이었지요. 형을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 것만 해도 벅찰 텐데 나까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해야 할지 잘 알기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린 마음에 송아지를 안 키우면 자칫 중학교에 못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지게를 메고 꼴을 베러 산이나 들로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평일보다 좀 여유가 있는 휴일에는 송아지를 들판으로 몰고 나가 풀을 뜯어 먹게 했지요. 어쨌든 송아지를 키워 남은 이익금으로 중학교에 갈 수 있었고,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세 마리의 송아지를 더 키웠습니다.

 

문제는 고등학교 입학이었지요. 형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재수를 준비해야 했으니 부모님은 내가 집안일 돕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럴 만도 했지요. 학교에 가는 형제자매가 늘어날수록 학비를 마련하는 문제는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오죽하면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송아지를 키우라고 했을까하는 생각이 했습니다. 더욱이 아래로 여동생 둘과 남동생 둘도 줄줄이 입학하고 진학하고 그럴 텐데, 어찌 첩첩산중을 헤쳐 나갈까 암담했을 겁니다. 계속해서 논밭을 팔아야 하는 일이 생겨난 것도 학비 문제였지요. 결국 고등학교 진학하는 대신 집안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고등학교진학 자진 포기에 효심이 지극하다고 칭찬했지만 속상하긴 마찬가지였지요. 뒷산에 올라 아무도 듣는 이 없는데 어둠이 내릴 때까지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들판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 보려는 심사였지만, 그런다고 텅 빈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요. 애꿎게 옷만 적셔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의 호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안개에 덮인 길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지요. 고등학교를 못 보내는 부모님의 참담한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달리 상황을 반전시킬 뾰족한 묘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이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한 겁니다. 선생님은 하루가 멀다고 아버지를 찾아 소주잔을 건네며 나를 일러 너무 아까운 놈이니 고등학교에 보내라고 매달리다시피 사정했지요. 이런 선생님의 끈질긴 설득에 아버지도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술 한 잔하고 들어온 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 나를 부르더니 고등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지요. 기다리던 일이었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제 마음속에 살아계신 불멸의 존재입니다.

 

60년대만 해도 농촌엔 끼니를 걱정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다며 쌀을 봉지에 담아 나간 후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지요. 그리곤 우리도 궁색한 처지에 다른 집 걱정하는 게 가당한 일이냐는 어머니의 역정에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습니다. 우리 형편도 녹록치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지요. 홍수로 둑이 터져 온 동네가 피난했을 때도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었습니다. 가진 건 없지만 인정이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분이었지요. 이웃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냈고 어머니와도 특별히 다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돈 되는 일이면 어떤 궂은일도 마다않는 어려움 속에 논밭까지 팔아가며 6남매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키셨지요.

 

일찌감치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공직의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고3여름방학 때 공무원 시험을 보았지요. 아직 2학기 공부도 남았고 군필자에게 부여되는 가산점도 없어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죽어라 시험준비를 했습니다. 시험 전날 한잠도 안자도 마지막 정이를 하고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정신없이 시험을 보았는데 운이 따랐는지 덜컥 합격을 했지요.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는 동대문시장에 가서 점퍼와 바지 두 벌을 사주셨습니다. 교복 외에는 변변히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아버지의 선물이었지요. 나는 그 옷을 입고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공무원의 길을 숙명처럼 걷게 됐습니다. 공직을 시작한 지 20년이 조금 넘어 사무관으로 승진했지요.

 

아버지는 승표야! 기왕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니 잘해서 면장까지 해라하고 말씀하셨는데 예상보다 승진이 빨랐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마 동네잔치를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사무관으로 승진해 가장 먼저 달려간 곳도 아버지를 모신 산소였습니다. 큰절을 올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승진하거나 자리를 이동하게 되면 늘 선산을 찾아 아버지에게 인사를 인사 올리곤 했지요.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묘소 앞에 가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와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88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인사를 갔습니다. 아버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가 한잔 걸치고 들어와 미안하다. 너는 꼭 대학에 보냈어야 하는데...”라며 울먹이셨습니다. 자식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미안하고 슬펐던 것이지요. 대학을 가지 못한 아쉬움은 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사는 형편이 나아졌을 때, 뒤늦게 야간대학에 입학했지요. 법률행정학과였는데, 사무관 승진시험 때 공부했던 내용이라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대학원으로 진학해 행정학 석사학위도 받았지요. 젊은이에게 뒤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수석 졸업의 영광도 안았습니다.

 

42년 넘게 걸어온 공직의 길은 절대 가볍지 않았지요. 힘들고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었지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일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만큼 그것이 주는 행복감과 자랑스러움은 다른 것에 견줄 바가 아니었지요.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고위직에 올랐고, 공기업 CEO까지 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부모님과 경기도에 가되지 않도록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처음 도청 간부회의에 참석했을 때 지사의 권유로 이렇게 취임소감을 말하고 울컥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순 둘 젊은 나이에 거짓말처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엊그제 아흔 둘되신 큰아버지의 장례를 모시고 왔지요. 30년을 더 사신 셈입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사흘 내내 울컥울컥했습니다. 문득 문득 고생만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절절히 뵙고 싶을 때가 있지요. 아버지는 마음속에 살아계신 든든한 버팀목이자 큰 가르침을 주는 불멸의 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제 일곱 살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지요. 가진 건 없지만 넉넉했던 웃음소리와 이웃을 배려하며 사셨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정말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