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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가방, 찢어진 구두

홍승표 2021. 4. 16. 20:00

“이 구두를 번갈아 신을 테니 닦아놓아요.” 80년대 말, 새로 부임한 임사빈 지사께서 구두 한 켤레를 비서실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새 것이 아니라 오래 신은 구두였지요. 두 켤레의 구두를 번갈아가며 신었는데 가끔 낡은 구두창을 바꿔달아야 했습니다. “이 구두가 지사님 구두 맞아요?” 도청에 상주하면서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 묻더군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구두를 바꿀 때가 지난 것 같아서 그럽니다.” 검소한 것도 좋지만 나름 사회적 체통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사님! 구두 닦는 사람이 구두가 낡았다며 지사님 구두가 맞느냐고 하는데 이참에 새로 하나 장만하시죠?” “그래? 물 안 새면 되지 뭐”. 그 때 그 한마디에 뒤통수가 뜨끔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이 떠나고 서울법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 후 내무부에서 일하다 당시 인천직할시장을 거쳐 경기도지사로 영전한 이재창 지사를 모시게 되었지요. 강직하고 꼼꼼한 성격에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아침에 지사 공관으로 가서 지사를 모시다가 공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보좌하는 게 저의 임무였지요. 적어도 10년은 훨씬 넘었을 법한 낡은 가방에는 서류가 가득 차는 날이 많았습니다. 지사는 밤늦도록 공관에서 결재를 하면서 첨부된 서류까지 꼼꼼히 살펴봐 직원들이 긴장했지요. 그 낡은 가방을 보며 실, 국장들과 많은 도청 직원들이 가방을 바꿔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쓸 만하고 개인 가방을 공금으로 쓰면 안 된다.“는 지사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부(副)지사가 지사 생일날을 맞아 아침에 생일축하의 뜻으로 가죽가방을 선물했지요. 실, 국장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은 거라며 반강제(?)로 안겨드렸지만 지사는 과한 선물이라며 극구 사양해 일단 비서실에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졌지요. 점심 후, 돌아오는 길에 지사께서 카폰으로 출입기자와 통화를 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어느 국장이 그 얼마 안 되는 분담금을 국 주무과장에게 말했고 그 과장은 과 공통경비에서 마련해 전했다는 것이지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직원이 출입 기자에게 제보했고 기자가 확인 취재차 전화를 걸어왔던 것입니다. 한 바탕 난리를 치룬 끝에 가방은 백화점으로 돌아갔고 부지사와 해당국장은 졸지에 역적(?)이 됐지요.

 

김상조 교수가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리던 날, 들고 온 낡은 가방이 화제가 됐었지요. 큰 갈색의 가죽 가방은 옆면이 다 해져 흰색 밑천이 드러났고 손잡이는 닳아서 누렇게 변색이 돼 있었습니다. 그 뒤,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영전해 일하던 그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지요. ‘임대차 법’ 시행 이틀 전, 본인의 서울 청담동 아파트 전세금을 14%넘게 올리며 갱신한 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낡은 가방 속에 14억이 든 통장과 불공정 계약서가 있었을 거라는 비아 냥이 쏟아졌지요. 10년 전에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의 낡은 구두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4,7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도 찢어진 구두와 낡아서 헤진 운동화를 신은 후보가 있었지요. 그의 재산은 50억이 넘었습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나 인사청문회에 나온 후보자들이 보여준 낡은 구두나 가방은 정말 눈속임 그 자체였지요. 한 순간 속임을 당한 국민들은 ‘뒤축이 해진 낡은 구두’에 감동했고 ‘낡은 가방을 봐라. 현재의 그는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권좌에서 물러났고 어떤 이는 그들에게 있어 ‘세상이 무대이고 인생이 연극인 이들에게 국민은 표를 사는 관객일 뿐’이라고 했지요. 부자가 되고 싶은 서민에겐 서민 흉내를 내는 정치인이 아니라 서민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눈속임이나 연극이 아니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제를 되살리는 게 필요한 것이지요. 낡은 구두나 가방이 다 같은 게 아니라 거짓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