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사라지기 전, 여명(黎明)의 빗장을 여는 숲길을 찾았습니다. 승천을 앞둔 용처럼 산자락을 휘저으며 지나가는 안개 한 무리를 만났지요. 어둠의 꼬리가 사라지는 숲의 여울목마다 새로운 생명의 불씨를 댕기는 운무가 순은의 매듭을 풀며 알몸으로 깨어나고 있었지요. 이제 막 둥지를 나선 먼동, 어렴풋이 밝아오는 숲길에서 숨소리를 죽이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무에 바람이 찾아들고, 알 수 없는 떨림이 가지마다 물결치고, 겨우내 잠들었던 물소리가 아장아장 귓전으로 걸어오네요. 힘겨웠던 시간이 치유되고 새로운 꿈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침묵보다 그리운 날, 그럴 때 아무 생각 없이 숲에 듭니다. 빈 가슴을 채우는 영롱한 물소리, 그 소리에 숲 밖의 일은 잊게 됩니다. 저마다 다른 몸짓들로 어우러진 둘레마다 새 소리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고, 온 누리는 숨을 죽인 채 이들의 합창을 듣지요. 산도 숲도 고요하고 새도 날지 않을 때면 안개가 대신 산을 오릅니다. 그것들은 때때로 벌과 나비가 되어 산허리를 휘돌아 날고, 그 날갯짓이 둘레둘레 빛 부신 메아리가 되어 잠든 숲을 깨웁니다.
새벽 숲길에 침묵이 있습니다. 그 고요함 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잠에서 깬 나무들이 닫힌 가슴 풀어헤치고 저마다 새살이 돋도록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청태(靑苔) 낀 고목도 옷고름 풀어 헤치는 미려한 바람의 살가움에 낮은 숨소리로 반응합니다. 막 깨어난 눈빛들로 빛나는 숲에 금촉 은촉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결 고운 햇살을 골라 그 바람에 이우며 여백을 둘레둘레 물들입니다.
새로운 움이 트기 시작하면 이미 마음은 초록 물결로 넘실댑니다. 나무들 마디가 미처 옹골차지기도 전에 세상이 온통 풀꽃 바다로 출렁거리는 듯 보입니다. 잔잔한 바람의 선율, 그 바람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잎사귀들, 빛에 취한 아지랑이가 무지개로 춤추는 풍경을 보면 온몸이 물들어 어느새 마음은 쪽빛 창이 되고 입술이 달싹거립니다. 그 달싹거림이 시어(詩語)가 되기도 하지요.
잠에서 깬 나무들 이야기를 끝내기도 전 산자락 저 멀리에서는 물기 가득한 햇덩이가 솟구쳐 오릅니다. 젖빛 뽀얀 햇살 한 자락이 눈웃음을 날리는 숲길, 웃음소리가 넘쳐나지요. 술래잡기하며 뛰노는 물소리, 잠에서 깬 새들이 후드득 물기를 털고 숲에서 날아오릅니다. 바람의 빛과 향기에 맞춰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나비 떼가 몽환적입니다. 산허리를 오르던 안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곡의 신명 난 물소리에 지난밤의 기억을 씻어냅니다.
새벽, 숲길에서 잠시 한 그루 나무로 서서 ‘나는 누구인가?’ 화두를 던져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친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간격을 줄이기 위해 나는 얼마나 나를 곧추세워 보았는가? 숲에 들면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는 합니다. 아무도 없는 시공(時空) 속에서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 눈감으면 더 가까이 그려지는 어색하고 낯선 얼굴, 두 얼굴의 나를 볼 수 있는 것이 숲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고 축복이지요.
이순(耳順)의 그림자가 돌부처로 앉아 있습니다. 어설펐던 지난날의 허물을 벗고 다시 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빛으로 서는 여백(餘白) 둘레둘레 잎 모우고 부챗살 이우는 가지 무지갯빛 새살이 돋아나는 숲길, 그 맥박 고른 숨소리 결 고르는 쪽빛 하늘, 지난날의 허물을 벗고 다시 서는 순간은 행복한 시간이지요. 이제 막 깨어난 눈빛, 새 순 돋는 길목마다 금촉 은촉 바람이 불어옵니다. 새벽 숲길에서, 새순이 돋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잎을 떨구는 선순환의 이치를 다시 돼 새겨 보지요. 솟구치는 햇덩이를 힘껏 보듬어 안으며 이렇게 숲속 한가운데서 새날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