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진다.^^

홍승표 2021. 6. 30. 10:24

홍 부시장님! 저하고 일본에 함께 다녀오시지요.”

과천에서 일할 때, 최종수 문화원장이 제안을 했습니다. 3천점이 넘는 추사 관련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한 후지츠카아키나오(藤塚明直)’ 선생의 기일에 가자는 것이었지요. 당시 과천시는 추사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복원하고 추사박물관건립을 준비했는데 그 중심에 최 원장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삶으로 대업을 이룬 추사, 그를 기리는 최 원장의 열정과 가치 있는 삶을 존경하던 터라 쾌히 응했지요. 단둘이 당일치기로 일본으로 날아가 묘역을 찾아 꽃과 술 한 잔 곁들여 절을 올리고 왔습니다. 추사는 말년에 4년 동안 과천에서 달관한 인생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지요.

추사가 귀양지인 제주도로 가기 전, 오랜 벗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경내를 돌아보다 대웅전 현판을 본 추사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지요.

이보게 초의, 어찌 저런 현판을 걸어놓았는가? 당장 태워버리게. 차라리 내가 하나 써줌세.” 현판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정립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지요. 느닷없는 추사의 말에 초의선사는 말없이 웃으며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리곤 추사가 떠난 후, 왼편에 있는 백설당(白雪堂)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을 걸었지요.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마치고 난 된 추사가 다시 초의선사를 찾았습니다.

초의 내가 쓴 현판은 태워버리고 이광사 글씨를 다시 걸게!” 초의선사는 이번에도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그러자고 했고 추사는 홀연히 떠나버렸지요. 초의가 추사 글씨를 백설당에 걸은 건 대웅보전 현판과 바꿔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의 현판은 대웅전이나 대웅보전, 극락보전, 무량수전과 같이 전(殿)이어야하는데 추사가 쓴 글씨는 각()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초의가 추사의 글씨를 백설당에 달아놓은 것입니다. 원교나 추 의 글씨 모두 대가(大家)의 경지인 알았기 때문이지요.

추사는 유배생활동안 수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삶을 다시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일찍이 서체 확립과 학문적 성과가 세상 최고라고 칭송받으며 살아왔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역량이 많이 부족했다는 걸 절감하며 정진을 거듭했습니다.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진다.’는 진리를 터득한 것이지요. 유배 후, 돌아오는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 자신의 글씨를 태워버리라고 한 것도 이런 깨달음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지난날 철없이 기고만장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인생의 연륜도 무르익었기 때문이지요.

 

추사에겐 초의선사와 같은 벗이 또 있었습니다. 유배 중인 사람을 돕다가는 불똥이 어떻게 얼마나 튈지 모를 판에 귀한 책을 120권이나 보내준 역관 이상적이지요. 한 권이 집 한 채 가격인 것도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 정성에 보답할 길이 없던 추사는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바로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청나라 학자들의 극찬을 받았고, 오늘날 우리 회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국보이지요. 추사가 혹독한 유배 생활을 겪지 않았다면 세한도와 추사체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엔 나 잘났다고 설치는 사람이 많지만, 훗날 설익고 어설펐던 시절을 후회하게 되겠지요.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도 좋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게 상도(常道라는 생각입니다. 살아보니 세상엔 고수가 많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당대에 손꼽히는 대가였던 추사도 그러했을진대 하물며 어쩌다 금배지나 완장을 찼다고 그저 그런 애송이가 잘난 척, 설쳐대는 걸 보면 절로 저절로 헛웃음이 나오지요. 추사 선생의 현판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두고두고 곱씹어야할 보약 같은 일화입니다.